여성해방운동의 선봉자 김시숙
여성해방운동의 선봉자 김시숙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2.0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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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수필가

제주 출신 여성 선각자들 이야기를 하는 중에 김시숙 지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에 못지않은 독립운동가였고 노동운동가였음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약간 부끄러웠다. 

김시숙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갔지만, 단행본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제주의 인물사를 많이 쓰신 故 김찬흡 선생님이 제주문화원 발간 책자에 그녀의 업적을 글로 쓴 게 있었다. ‘여걸 김시숙(金時淑)의 생애’라는 글이다. 제주 MBC 특집 다큐멘터리 ‘민족 여성의 혼불 김시숙’이라는 영상자료가 2022년에 제작되어서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시숙은 1880년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조천의 김시용, 김운배, 김문준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김해김씨 집안의 자손이다. 구한말 조천리는 항구였기에 외국 문물을 보다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영향으로 조천 사람들은 일찍부터 민족의식과 개화에 눈떴다.

김시숙은 1919년 3월 조천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어린 친척 동생과 조카가 만세운동을 이끄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결혼하였지만 이혼, 두 번째 결혼도 실패하였다. 당시에 여자가 이혼한다는 것은 집안의 수치며 인생 실패라 여길 때이다. 김시숙은 개의치 않았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게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시숙은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우면서 계몽운동에도 관심을 두게 된다. 1925년 스무 살 아래인 최정숙(崔貞淑)·강평국(姜平國)·이재량(李載良)·고수선(高守善) 등과 교류하면서 그들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제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썼다. 고향 초천리에 ‘여성 야학소’를 개설하여 여성들도 글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열성을 다했다.

1927년 김시숙은 야학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방적공장에서 일하는 동포 여성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보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재일여공보호회(在日女工保護會)’·‘재일여공소비조합’을 만들어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그녀는 1933년 7월 15일 오사카 적십자 병원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국에서 노동운동, 항일운동으로 몸을 돌보지 못한 탓이다. 제주 출신 공장노동자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각여성김시숙호상회(先覺女性金時淑護喪會)’를 조직하여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시신을 제주도로 옮겨와 조천에 안장하였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잊히지 않는 그녀의 말이 쟁쟁거린다. ‘사름으로 태어낭, 종처럼 사느니 사름답게 살아 사주’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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