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령
가을의 전령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0.3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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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봄날 마당 한 귀퉁이에 심고는 잊고 지냈다. 여름이 지나면서 점점 세를 불리더니 제법 자리를 잡는다. 가을에 보겠다고 옆에 심어 두었던 국화가 기세에 눌려 오금을 못 펴고 있는 게 안쓰럽긴 한데 자리를 옮겨 심으면 탈이 날까 봐 가만히 두고 본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는 날씨에도 연한 보라색을 띠고는 탐스럽게 꽃대를 올린다. 가을을 알리려는 듯 사뭇 비장한 모습이다. 온 우주를 들어 올리려는지 기세가 당당하다. 꽃 이름이 구절초인지 쑥부쟁이인지 아니면 벌개미취인지 아리송해서 검색했더니 이름과 함께 꽃에 담긴 전설도 알려준다.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금실이 좋은 대장장이 부부가 있었다. 어려운 살림살이였어도 예쁘고 맘씨 좋은 큰딸은 봄이 되면 틈나는 대로 산에 올라가 쑥을 캐서 동생들에게 맛난 쑥 요리를 해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큰딸을 ‘쑥 캐러 다니는 불쟁이의 딸’이라는 뜻으로 쑥부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느 해 봄날 쑥을 캐러 갔다가 함정에 빠진 사냥꾼을 구해주는데 둘은 사랑에 빠진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떠난 사냥꾼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를 잊지 못하고 기다리던 어느 날 큰딸은 발을 헛디뎌 산비탈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다음 해 쑥부쟁이가 떨어진 자리에 가녀리면서 예쁜 꽃이 피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큰딸을 애도하면서 쑥부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꽃말은 ‘기다림’, ‘그리움’이라고 한다. 꽃이 피어나는 날들을 그리움으로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찬찬히 다시금 보게 된다. 시월이라 날씨도 적당하고 가을볕이 아까워 들로 산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노을이 지는 시간에 와인색으로 물드는 억새 사이사이에 자세히 보면 수수한 들국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히 걷지만 말고 길섶에 핀 작은 꽃들에도 인사말을 건네는 나와 마주하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다.

올가을 우주를 들어 올리는 쑥부쟁이와의 인연에 안도현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그나마 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쑥부쟁이와 벌개미취를 구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나하고 절교하지 않아도 되어서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 안도현의 시 ‘무식한 놈’ 전문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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