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로쿠’도 없지만
‘게이’ ‘로쿠’도 없지만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3.10.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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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정에 아소산(阿蘇山)을 넣은 것은 순전히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 이백십일(二百十日) 때문이다.

이념이 넘치던 대학 시절 읽었던 책. 충동과 열정에 가득 차 세상의 많은 것을 직접 겪어보고자 하는 ‘게이’. 그리고 현실적인 조건을 판단하고 이성적이고 안전한 결정을 하려는 ‘로쿠’. 세계 최대의 화산이라는 규슈 아소산 지역을 배경으로 구마모토(熊本) 온천 료칸에 묶고있던 이 두 청년이 용암이 분출하는 아소산을 오르는 이야기다.

지난 1월 혹가이도 여행이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눈의 나라’와 함께 했다면, 지난 주에 간 ‘불의 나라’ 규슈 여행에는 ‘이백십일’ 두 청년을 불러냈다. 하지만 이제 아소산엔 용암도 흐르지 않고, 두 청년 ‘게이’와 ‘로쿠’도 없었다.

▲그렇다고 실망만하지 않은 것은 아소산의 느릿한 능선의 구릉산지를 덮은 초원. 마치 우리 한라산 평화로 주변과 닮았다. 말등에 올라 여유를 만끽하는 초원 승마…. 사람들은 억새 사이에 숨은 싱그러운 바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또 이런 것도 알았다. 아소산이 화구호 안에서 폭발로 생성된 복식화산이란 사실이다. 아소산을 가려면 가파른 고개를 넘는데 그게 실은 산이 아니라 화구호 벽체(외륜봉)였다.

그리고 그건 아소산 주변의 광활한 평야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동서 16㎞, 남북 27㎞의 타원으로. 아소산이 있는 규슈는 자연과 삶이 모두 화산과 엮여 있다. ‘불의 나라’라 불리는 건 그 덕분. 온천이 되는 지하수를 용암이 펄펄 끓이고 있었다.

▲여행은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낯선 풍경을 보는 것에 끝나지 않고 새로운 눈과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하는 건 여유가 난 탓이리라. 작가나 음악가 등 예술가들이 여행에서 영감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내가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여행을 하든 외국여행을 하든 여행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들뜬 마음은 가슴과 머릿속에 가득 찬 일상의 잡념을 사라지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기억의 저편에 숨겨졌던 생각으로 채워진다. 더 많이 비워둘수록 더 많은 것을 불러내어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일 게다.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과 머리도 가벼워지니까.

▲‘충동’과 ‘열정‘, ’현실’과 ‘이성’이란 말처럼 열나게 토론했던 말이 더 있을까.

‘게이’와 ’로쿠‘는 내 모습이었다.

그 활화산 같은 날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길 아소산 정상 근처 휴게소 매점. 중국말과 한국말이 어지러운 관광객들 사이로 ‘게이’와 ‘로쿠’에게 료칸의 숙객이 속삮이는 말이 가는 귀 막은 내게도 들렸다.

“공부를 많이 하면 뭘해,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지…”

아소산은 떼돈을 벌고 있었다.

유럽 여행은 성당 순례, 중국 여행은 고성(古城) 답사, 그리고 일본 여행은 온천 목욕뿐이라고는 하지만 여행은 좋은 것이다.

괜찮은 인생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 한다. 여행은 그런 추억을 만드는것 같다. 또 그렇게 여행을 다녀 오면 풍진(風塵) 일상이라도 6개월쯤은 버틸 수도 있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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