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와 함께한 지리학의 보고, 하논굼부리
고난의 역사와 함께한 지리학의 보고, 하논굼부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0.1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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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하논굼부리
익은 벼를 추수하는 하논굼부리 안에서 본 한라산 전경.
익은 벼를 추수하는 하논굼부리 안에서 본 한라산 전경.

하논굼부리는 서귀포시 호근동 149번지로 북동쪽 삼매봉은 서귀포시 서홍동인데 하논과 경계를 이룬다. 삼매봉 기슭을 끼고 있는 하논은 마치 거대한 원형경기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2002년에는 야구장을 계획하다가 환경단체의 반발로 계획이 취소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하논은 국내 최대 마르형 굼부리(분화구)의 특징을 보여주는 ‘응회환기생화산체’이다. 화구는 둘러싼 화구륜의 지형이 완벽히 남아 있고 화구륜은 일주도로를 사이에 두고 삼매봉의 분석구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고, 화구륜의 동남부는 침식되어 천지연(상류)과 연결되어 있다. 화구 내 보롬이(서홍동, 92m)는 화구 서남쪽에 독립된 오롬으로 삼매봉과 마주 보고 있다.

하논 화구 북사면 기슭에서 흘러나오는 샘은 오래전부터 논밭에 이용된다. 그래서 제주도의 몇 안 되는 논농사 지대 중 한 곳이 되었다. 화구륜 사면에는 과수원이 조성되고 호근리쪽 일주 도로변의 북쪽 능선(호근동, 88m)에는 지금 ‘올래 안내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도로변 응회환들은 과수원을 일구며 돌담 등으로 이용되면서 하논의 형체는 날로 훼손돼 온 실정이다.

보롬이는 굼부리 등성이와 달리 독립된 봉우리로 삼매봉(서홍동, 104m)과 마주 서 있는 하논 굼부리와 접해있는 봉우리다. 하논은 서귀포에서 가장 귀한 지리적 명소로 서귀포에서 유명하다는 천지연·정방폭포·천제연폭포들도 하논에 비하면 별 개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폭포는 한국에도 세계에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논은 지리상으로도 흔치 않은 곳이다,

또한 ‘하논굼부리’의 의미·어원도 잘못되어 있다. 제주어의 ‘하’는 한국어의 ‘크다(길이)’가 아니고 ‘하다’로 한국어의 ‘많다’라는 면적을 뜻한다. 이는 한국어’의 ‘크다’와 전혀 다른 말이다. 제주도에는 논밭이 거의 없는데, ‘하논’은 논밭이 ‘많다’는 말이다. 논밭을 만들려면 물이 많아야 하는데 하논은 지하수가 끊이지 않고 이탄과 참흙이 물을 가둬주어서 논밭을 만들 요건이 맞았다. 따라서 하논은 ‘분화구’가 아니고 제주어인 ‘하논굼부리’가 되어야 한다.

하논 굼부리 안에서 본 작음오롬 보롬이(서홍동)
하논 굼부리 안에서 본 작음오롬 보롬이(서홍동)

하논굼부리 지하의 마그마는 가스가 지각의 틈을 따라 퍼지다 지하수를 만나 폭발하여 굼부리가 생겨났다. 이때 나타난 지하수가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이다. 이런 현상이 지리학의 ‘마르형분하구’이다. ‘하논굼부리’를 소개하는 부로셔에 하논분화구(굼부리)가 국내 유일의 마르형 분화구라 하나 그렇지 않다. ‘한국의 마르형 분화구 중에 제일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논굼부리는 백록담보다 그 규모가 큰 데 5만 년 전 폭발하였다. 하논 보다는 작으나 김녕리 삿갓오롬도 마르형굼부리로 10만 평방 정도이다. 삿갓오롬 굼부리도 ‘문장지’라는 샘이 있어 논밭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는 논으로 사용되지 않고 특작을 하는 밭으로 사용된다.

지리학적으로 서귀포 층이 100만년 전 생성된 거로 보면 하논은 5만 년 전 생성됐으니 그보다 젊은 ‘현상’으로 보면, 지리학에서는 제주도의 생성과정과 화산활동을 알아볼 수 있는 자산임이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하논은 제주도 지리학의 보고일 뿐 아니라 세계의 보고이다.

하논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쪽의 봉림사는 최해봉 스님이 용주사라는 명칭으로 시작했는데 4·3사건 때 전소되고 그 후, 혜공 스님이 재건하여 황림사로 불리다가 지금은 봉림사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의 불교 역사는 오래전 남방불교로 이어지다가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라졌다가 그 자리에 북방불교가 사찰을 재건하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1900년 김원영 신부가 설립한 하논성당은 번창하던 중에 이재수가 촉발한 신축교란으로 사라진다. 최근 서귀포성당에서 ‘뿌리찾기사업’으로 성당 터와 순례길을 회복한다지만, 이 일로 개신교는 1907년에 이기풍 목사가 산북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하였으나 서귀포는 1922년에 이르러서 법환교회가 뒤늦게 서귀포에서 개척된 것도 이런 영향을 받게 된 까닭에 서다.

1948년 전 시작된 4.3사건은 제주도 전 지역이 어려움을 당하였다. 하논굼부리의 봉림사나 하논성당도 이때 불타고 주민들도 모두 떠나고 기름진 하논평야도 황폐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곳 하논에 벼농사를 다시 시작한 것도 몇 년이 지난 1953에서 1955년쯤이나 될 것이다.

1995년도에 ‘오롬 나그네’을 집필한 김종철은 하논에 대한 언급이 없다. 2002년 분화구에 야구장 건설 계획은 환경단체의 반대로 철회된다. 2006년 이후 하논 복원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2023년 필자는 굼부리 논밭에 들어가서 관찰하였다. 하논의 논밭은 벼가 무르익어 콤바인으로 추수하고 있었다. 한라산은 푸르고 중턱의 귤밭은 평화롭게 익어간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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