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本色)의 계절
본색(本色)의 계절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10.1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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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숲을 걷다보면 마음이 겸허해진다. 마주치는 만산홍엽(滿山紅葉). 그 현란한 가을 색감(色感)에 감탄하지만 사실은 그게 나무들의 본색(本色)이다.

생기 오르는 봄이나 푸름을 자랑하는 여름에는 잎들이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본디 바탕이 빨강, 노랑, 갈색이지만 한창 잘 나가는 계절에는 온통 파랗게 녹색으로 치장을 한다. 그러니 어느 것이 노란 건지 붉은 건지, 어리석은 인간들만 구분하지 못 할 뿐이지 나무들은 서로가 다른 걸 알고 함께 서있다.

뿐이랴. 요즈음 가을 나무를 바라보면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띈다. 화려한 꽃이나 무성한 잎으로 가렸던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제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올해는 한라산 단풍이 지난해보다 8일 빨리 왔다고 한다.

계절이 빠른만치 나무들도 저마다 본색과 수형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나무의 굵은 줄기나 잔가지 하나 하나. 지난 한 해도 쉽지 않았지만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이웃 나무와 햇볕을 경쟁하며 때로는 휘어지고, 때로는 키를 키우고, 얼키고 설켜 살아온 지난 한 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나무들의 삶이 드러나는 순간인 듯 싶다.

가을 숲에 가서 단풍이 들고 잎이 지는 나무를 볼 때 느껴지는 서늘하고도 애잔한 마음은 그 삶의 희비가 가슴에 와 닿는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꼭 봐야할 것은 단풍이 들고 난 뒤 잎이 지는 자리다. 그 작은 가지에 잎은 떨어져 없어지지만 봄 여름 내내 잎이 달렸던 흔적은 남는다.

한 해 동안 양분과 수분을 이동시켰던 관 속의 그 흔적에 동아(冬芽), 즉 겨울눈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내년에 새 줄기가 되고, 새 잎이 되고, 새 봄꽃이 될 것들이 모두 이 동아에 숨어 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일. 그것은 겨울에도 멈추지 않고 그 속에서 꽃눈을 열심히 분화시킨 가지에서 가장 먼저 새 봄을 여는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이다.

인간 세상에도 언제나 겨울이 존재한다. 계절적 겨울도 있지만,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삶의 겨울이다. 한라산 단풍 소식에 문득 세월의 흐름을 느끼면서 괜히 가슴이 철렁한다는 이들도 있다.

▲올 가을은 경기침체에다 계속되는 정치혼란까지 유독 마음 둘 곳이 마땅찮다.

시중 금리도 빠르게 올라 한계기업들이 도산에 몰리고 빚이 많은 가계들은 벼랑끝에 서있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위협하고 있다. 택시요금이 오르고 전기요금 인상도 대기 중이다. 곧 닥칠 ‘춥고 긴 겨울’을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는 정도로는 크게 부족해 보인다.

이제 본색의 시간이다. 자기 색깔이 없는 풀들은 벌써 시들었고 무성했던 초목들의 제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옛 시인은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붉다’(당나라 두목)고 했고, 윤동주 시인은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이 마련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가을 단풍엔 쇠락의 시간을 넘어 부활을 준비하는 색깔이 배어 있다.

나라와 지역사회, 기업과 가계도 위기의식을 바짝 끌어올려야 한다. 국가경제의 구조조정과 부채 다이어트 등 고통스럽더라도 고강도 월동 채비를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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