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고뇌
과학의 고뇌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9.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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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울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논설위원

과학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기까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나는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나는 과연 진리를 담보할 수 있는가. 이것은 자신의 권능에 대한 질문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과학 자신은 상당히 곤혹스러워진다. 과학은 인간의 기대와 달리 객관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참 너무하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과학을 자의적으로 재단한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한쪽은 과학의 이름으로 찬성하고 다른 한쪽은 과학의 이름으로 반대한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목적을 감추기 위해 과학을 동원하는 것인가. 그럴듯한 근거와 지표를 제시하면 자신들의 속마음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러는 것인가. 이러나저러나 과학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싱숭생숭하다. 

과학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과학에 매달리는가. 이 시점에서 과학이라는 말을 통해 과학의 본질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새로운 용어는 새로운 인식을 낳는다. 이 용어는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현상의 연속성을 숨겨버리기도 한다.

과학이 사이언스(science)의 번역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언스라는 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영어 사이언스의 어원은 라틴어 스키엔시아(scientia)이고 이 말은 동사 쉬레(scire)의 명사형이다. 쉬레는 ‘알다’라는 뜻이니 스키엔시아는 ‘지식·인식’이라는 뜻이다. 어떤 대상을 분석해서 알아가는 인식 과정과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이 사이언스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출발했다. 당시 자연철학자들은 인간의 윤리, 도덕이나 사회, 정치보다 세상의 근원에 관심이 있었다.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현상 세계를 쪼개고 쪼개서 근원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 세계에 대한 의심과 질문이 필요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 그리고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것. 이것이 자연철학의 출발이었다. 이 의심과 질문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이를 실험과 관측으로 뒷받침하는 것, 이것이 자연철학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사이언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사이언스라는 말은 동아시아에서 과학(科學)이라는 말로 재탄생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1874년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사이언스를 과학이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과학이라는 말에는 인식이니 지식이니 하는 뜻은 없다. 그냥 분과 학문이라는 말이다. 여러 분야로 쪼개서 연구하는 서양의 학문을 통칭해서 과학이라고 번역했던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과학이라는 말이 지금의 사이언스가 되었다. 

1+1이 2이든 100이든 1+1을 계산하는 것이 과학은 아니다. 과학은 의심에 대한 증명의 역사다. 의심을 허하라. 질문을 허하라. 의심과 질문을 막는 것은 비과학이요, 의심과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과학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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