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공화국’
‘괴담 공화국’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7.0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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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날.

할머니는 수박을 사오면 물을 흠뻑 적신 수건을 덮고 바람이 솔솔부는 뒷마루에 놓아두었다. 그렇게 한 두시간 후, 상방 마루에서 먹었던 수박은 정말 시원하기가 그지없었다. 훗날 “아~하 그렇구나~” 맥주병에 물을 적시고 냉장고에 넣는 걸 보고 알았다. 할머니의 수박은 ‘과학’이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온도가 30도 정도에 이르면 더위를 느낀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30도를 넘어서면 땀을 흘린다. 몸이 열을 식히려고 땀을 배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난 뒤 바람이 불면 시원하다. 바람이 수분(땀)을 빼앗아가면서 열도 함께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할머니 수박의 이치가 그러하다.

▲여름날 내리는 비에는 여러가지 이름을 붙인다.

특히 제주사람들은 ‘게역 비’라고 했는 데, 다른 이름은 그렇게 여유(餘裕)있는 느낌이 전혀 없다.

안개비, 이슬비, 가랑비, 소나기, 장대비 등과 같은 이름이 여유있을까.

폭우, 폭풍우, 호우, 집중호우 같은 한자말 비도 그렇고,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나 맑은 날 느닷없이 왔다 가는 여우비도 여유와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제주사람들이 여름 비를 ‘게역 비’로 일컫는 것은 그만큼 비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올 여름처럼 큰 바람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대는 이런 비는 뭐라 하나.

할머니는 여름날 비를 바라보며 ‘비 얘기’를 하곤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하면 회오리 바람 속에 흙과 벌레 등이 섞여 내리는 무서운 ‘괴우(怪雨)’가 내린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1970년대 장마철의 추억은 눅눅했던 기억뿐이다.

한 달 내내 비와 습기 때문에 옷이 마를 날 없었고, 나이든 사람들은 신경통이 도져 끙끙거린다. 아이들끼리도 ‘찢어진’ 우산때문에 학교에서 싸움도 잦았다.

장맛비는 정말 환영받지 못 하는 비였다. 워낙 질기게 ‘질질’ 내리는 탓에 몸은 처지고 기분은 영 개운치 않다. 인명과 재산 피해까지 낸다.

오죽했으면 천상병도 “7월 장마 비오는 세상/다 함께 기죽은 표정들/아예 새도 날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6월 장마는 쌀 창고, 7월 장마는 죽 창고”라는 말도 옛말이다.

장마는 이제 기후변화로 그 기간적 의미가 없어졌기도 하지만, 생활문화가 달라진 덕분에 장마철이 특히 불편하다는 걸 피부로 느끼지 못 한다.

▲문제는 이런 장마비에 ‘괴담’까지 더해져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다는 점이다.

기상학자들이 절대 아니라고 하는 데도 7월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장마비가 내린다는 ‘괴담’이 판치더니, 이번엔 ‘야행성 사우나 장마’ 등 별의별 괴담이 다 나오고있다.

정치가 괴담에 파뭍혀 있으니 과학이어야할 기상예보마저 괴담이 되고 있다.

기상예보뿐이랴. 이렇게 가다간, 나라가 온통 괴담으로 가득한 ‘괴담 공화국’이 되어 정말 ‘괴우’가 내리는 거 아닌가 걱정된다.

괴담에 빠진 청맹과니 정치인들이 내 할머니보다 못 한 말을 그만하고, 하루속히 제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세상에 눈 밝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장마 뒤에 오이 굵어지듯’ 우리의 희망도 자랄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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