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의 바다에서
불공정의 바다에서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6.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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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애 동화 작가

“일단 과거를 본 뒤 음서(蔭敍)를 기다려 보아라. 나와 정리가 두터운 분이 전형위원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할 수 있으련만 그렇잖다면 널 위해 분주히 권세가들에게 애걸할 수는 없다.”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일까? 이것은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과거를 앞둔 아들이 그다지 촉망받는 인재는 아닌 듯 보인다. 퇴계 역시 자녀의 입시와 취업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모양이니 고관대작도 그러하건대 필부(匹夫)들은 말해 무삼하리.  

음서(蔭敍)제도는 고려 목종 때 5품 이상 관직을 지낸 관리의 자제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시작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2품 이상으로 축소되었다. 비록 하급관리라 해도 고위직 관리의 친인척을 과거 없이 관직에 등용했으니 불공정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입시나 취업만큼은 투명해야 하며 능력을 입증할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져야 하고 등용에 있어서는 ‘내 자식이 먼저다’가 아니라 ‘인재가 먼저다’라야 공정한 사회다. 하지만 오늘날도 음서제의 망령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자녀 특혜 채용이 일자리 세습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관위만 그랬을까? 아마도 기관마다 전수조사한다면 비슷한 일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엉터리 스펙으로 시험 없이 대학을 가거나 의전원 또는 로스쿨에 입학하거나 부모의 지위를 이용해 취업하는 것은 결국 다 부모 찬스일 뿐이다. 로스쿨 졸업 후 유명 로펌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는 법조인 자녀들이 많아졌다는 건 무엇을 말하나? 이런 것들이야말로 현대판 음서제일 터다.

부모 찬스는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생각해 보자. 입학사정관제나 수시 제도 등을 만들어서 부모 찬스를 사용할 물꼬를 터주고 점점 확대를 해준 게 누구인가. 사시제도를 없애고 로스쿨을 도입해서 능력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의 기회마저 박탈한 게 누구인가.

시대가 변했으니 제도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하자. 글로벌 인재 육성도 좋고 암기 천재만 양산하지 말자는 취지도 타당하다 치자. 그래도 부모 찬스를 부추기는 제도라면 최소한 축소하거나 보완함이 마땅하지 않나? 그런데 정책은 늘 확대 일변도였다. 

좋은 대학과 양질의 일자리가 부모 찬스로 다 채워져 버리면 가진 것 없고 가산점마저 없는 서민의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소나 키우라고? 못난 부모 탓이니 감수하라고?

어차피 세상이 다 그런 거라고 하기엔 너무 씁쓸하다. 치열한 경쟁의 대열에서 부모 찬스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남들이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나 홀로 자전거를 타고 그들과 경주를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자식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쏟아야 할까. 말로만 공정을 외칠 게 아니라 특혜 채용은 엄단해야 하고 현대판 음서제로 악용할 소지가 많은 제도들은 과감히 개선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사회를 향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아, 상실감과 박탈감에 미리 움츠리지는 말자. 실력과 노력으로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불공정의 바다에서 조각배를 타고 노를 저을지라도 힘을 내자. 인생의 바다는 변화무쌍하여 때때로 예측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나는 법이니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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