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어떤 인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6.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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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 시인

법정 스님의 말씀 중에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라는 매우 단호하면서 심오한 뜻을 지닌 짧은 격언이 있다. 인간관계의 신중함과 어려움을 내포하는 뜻깊은 가르침이 들어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잘 가꾸어 오랜 시간 서로에게 진실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존중과 믿음으로 인생에 아름답고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만큼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처와 실망으로 신뢰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많다. 

얼마 전 미국 시카고에 다녀오는 일정 중에 대학교 친구를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과 동시에 시카고에 이민을 온 친구다. 한국과 미국을 서로 오고 가지 않으면 평생 만날 기회가 없다. 서로 얼굴을 본다 해도 십여 년에 한 번 정도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여대를 다니던 나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같은 과 여학생들이 유치하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 미래에 대한 비관적이고 반항적 태도로 전공에도 목표의식과 흥미를 갖지 못한 채 대학 생활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을 때였다. 여러 대학교가 연합으로 모인 보육원 봉사동아리 활동에 그나마 온 마음을 의지하며 열정을 쏟고 있었다. 외롭지는 않았지만,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힘이 되어줄 친구가 필요했다.

만남에는 첫눈에 반해 단박에 사랑에 빠지는 연인처럼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금방 친해지는 단짝이 있기도 하다. 또 주변을 빙빙 돌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속마음은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서로에 대한 묘한 이끌림으로 결이 닮아있는 편안함으로 필요충분의 기대가 적중하는 때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만남은 흔치는 않으나 정신적 가치와 내면적 성찰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화가 깊고 진지하게 흘러간다. 가볍고 성급하게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탐색의 긴 시간이 필요했던 덕분이다.

나에게는 같은 과 동기로 만났던 이런 친구가 있다. 서로 죽고 못 살듯 매일 붙어 다니며 지낸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졸업 때까지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가끔 우연히 만나면 몇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풋내나는 인생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몸이 기억하듯 희미하지만 깊이 각인되어있다.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얻는 단비 같은 만남이었다. 

이번 시카고 여행을 통해 인연의 무게를 다시 되돌아 생각해보게 되었다. 좋은 관계란 어떻게 생겨나는가, 만남은 어디서부터 필연적 인연이라 할 수 있는가. 이번에도 십 년을 훌쩍 넘긴 만남이지만 우리는 어제처럼 반가웠고 내일 다시 만날 듯 편안함으로 헤어졌다. 다음을 기약했지만, 그 무엇도 확신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낸 인생의 지금, 이 순간 변함없이 만나 소통할 수 있다는 감사함과 축복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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