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이사
과감한 이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6.0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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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이십오 년을 한 곳에서만 살았다. 아파트 시세를 좇아 이사 가는 이웃도 있었지만, 딱히 사는데 불편하지 않아 팽나무처럼 오래도록 살았다. 한 곳에서 너무 오래 살았는지 막상 이사 하려니 버려야 할지 가져가야 할 이삿짐 속에 넣어야 할지 고민이다. 그러다 보니 이삿짐 챙기는 시간이 더디기만 하다.

옷은 그나마 쉬웠다.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지만, 문제는 책과 항아리였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도 있었는데 시간 날 때마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욕심에 구입한 책이 애물단지가 되어 발목을 붙잡을 줄은 몰랐다. 오늘도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버려? 말아? 고민하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구입하고 설레며 서점을 나서고는 한시바삐 읽고 싶어 잰걸음으로 집에 왔던 기억이 새롭다. 세상살이에 지쳐 사람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고 싶을 때도 책에서 위로를 받으며 힘든 시기를 지나가곤 했다. 내가 가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등불이 되어 준 한 줄의 문장들도 책 속에 있었다. 책은 과감하게, 과감하게 주문을 걸며 버려야 한다는 선배 문인의 말을 떠올리며 책들을 분류한다. 이사 가야 할 집이 공간이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책에 대한 아쉬움이 이렇게 클 줄이야

책 못지않게 항아리 욕심도 많다. 베란다에 들어선 각각의 크기를 갖고 있는 항아리 위에다 화분을 얹어 놓으면 꽤 그럴듯한 실내장식 소품이 된다. 항아리는 돌아가신 형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말린 참깨와 녹두를 보관했던 항아리, 멜젓이나 자리젓을 담가 먹던 항아리. 손맛 좋은 형님이 만든 고추장, 된장도 담았던 항아리는 다행히 이사 갈 집으로 전부 가져갈 수 있어서 한시름 놓인다. 

넓지는 않지만, 마당이 있어 그나마 마음의 짐은 줄었지만 못 가져가는 책에 대한 미련에 마음이 편치는 않다. 무심코 시집을 펼쳤는데 시 한 편이 답을 주는 듯하다. 책의 빈자리, 밤하늘 별을 마당 가득히 들여 영혼을 위로하라고, 

영혼이 따뜻한 사람은
언제나 창가에
별을 두고 산다.
옛 유목민의 후예처럼
하늘의 거대한 풀밭에
별을 방목한다.
우리의 영혼은 외로우나
밤마다 별과 더불어
자신의 살아온 한 생을 이야기한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은
나의 목동이다.
연못가에 나와 앉으면
물가를 찾아온 양 떼처럼
별들을 몰고 내려와
첨벙거리다 간다.
- 한기팔 시인의 ‘별의방목’ 전문 -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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