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원작의 충실한 재현…당대의 스냅사진”
“매력적인 원작의 충실한 재현…당대의 스냅사진”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6.0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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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청년사 2005)

‘만화가들의 선생님’ 오세영의 작품집
 문자로 묘사된 삶의 풍경, 시각적 재현
오세영-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청년사 2005) 표지.
오세영-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청년사 2005) 표지.

우리 책방 안으로 들어서면 눈높이 위치에 요즘 유행하는 얄팍한 만화책과는 달리 제법 뚱뚱한 만화책 한 권이 놓여져 있다.

무려 847쪽이나 되는 엄청난 볼륨을 자랑하는 그 책은 몇 해 전에 좋은 인연이 있던 분에게서 분양 받았던 터라 내가 애지중지하는 놈이지만 요즘 우리 책방을 찾는 손님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 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내가 무척 아끼는 책이라 부러 자랑삼아 그나마 잘 보이는 곳에 둔 건데 이리 괄시(?)를 받으니 좀 서글프기도 했다.

얼마 전 그 놈을 분양해 주셨던 분으로부터 다시 제주에서 활동을 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보니 오늘은 그 책을 소개해 볼까 싶다.

표지에 그려진 월북작가 이태준의 소설 ‘아담의 후예’ 주인공인 안영감의 모습이 인상적인 그 책은 바로 ‘오세영-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청년사 2005)이다.

이태준이나 안회남 등 납·월북 작가들의 소설을 중심으로 김유정·이효석 등 남쪽 작가들과 림종상과 같은 북쪽 작가의 작품도 포함하여 모두 19편의 단편 만화가 수록된 이 책은 ‘한국적 정서를 예술로 승화’시켜 ‘가장 한국적인 화풍을 구사’해서 ‘근·현대사의 풍경에 대한 한국적 묘사가 탁월’했던 ‘한국 리얼리즘 만화 예술의 진수’이자 ‘만화가들의 선생님’라는 평가를 받았던 만화가 오세영(1955~2016)의 작품집이다.

1986년 만화잡지 ‘만화광장’에 단편 ‘탈바가지’로 데뷔한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의 의복과 살림, 건축과 풍경까지 치밀하게 연구하고 고증하여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살리려는 완벽주의자였다.

‘오세영-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 속 현덕의 ‘남생이’ 부분.
‘오세영-한국 단편 소설과 만남’ 속 현덕의 ‘남생이’ 부분.

국문학을 전공한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평론 ‘매력적인 원작의 충실한 재현’에서 그의 만화는 ‘문학적’이어서 ‘당대의 소설에서 문자로 묘사된 삶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재현’하여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힘겨운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고 ‘한 칸은 그대로 당대의 스냅사진’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는 이 책의 서두에서 본인의 작품들을 볼 때면 ‘낯이 화끈거려 오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갑자기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또 그런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그렇지 않으면 안달을 내기’까지 하는 것은 ‘그것이 저를 지탱시켜 주는 힘’이며 ‘대중 속에 있고서야 숨을 쉬는’ ‘예술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회화와 문학과 영화를 아우르는’ 표현 영역을 가진 ‘이 시대에 가장 진화된 예술 매체 중 하나가 만화’지만 그걸 대변해 주는 작품이 보기 드문 것은 ‘저 같은 철면피가 주제넘게 만화쟁이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도 ‘만화는 문학의 시녀가 아니라 예술 장르의 당당한 주인’임을 선언하고 ‘부끄럽지만 이 책이 세상에 나가 작게나마 그런 행세를 부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늘을 포기하는 것은 내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그린다. 천천히 쉼 없이 그린다.…도망가지 않는다”는 메모를 작업실 책상 앞에 붙어 놓고 작업했던 그 치열함의 결정체인 이 책이 지금은 절판되어 만나기 어렵게 되었고 점차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간다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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