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容용) 이야기
얼굴(容용) 이야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5.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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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호 시인·칼럼니스트

“엄마, 나 어디서 낳았어?”  
“응. 다리 아래에서 주워 왔지.”  
다리(脚각) 아래를 아이는 다리(橋교) 아래로 알아듣는다. 시냇가 징검다리 아래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이는 모른다. 가랑이골짜기(谷곡)를 에두른 말임을. 
한자에는 동그라미 필획이 없다. 한글의 동그라미(o이응) 필획은 한자에서는 네모(ㅁ미음)가 대행한다. 입모양을 미음(口구)으로 쓴다. 동그라미(口)에서 태어나는 순간, 어느 집(宀면) 가족인가, ‘금수저’인가 ‘흙수저’인가, 아들·딸 가름(별)이 지어지며, 평생 살아갈 얼굴(宀면·별·口구=容용)을 지니게 된다.

얼굴은 어떤 곳이며, 무엇이 내비치는 곳인가?  
얼굴은 얼(넋)이 글·무늬(文문)처럼 쓰이는 곳이다. ‘얼·글’이 얼굴로 모음동화(vowel assimilation)된 것이다. 어린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지러워진 나의 얼(넋)이 동화되어 평온하게 미소가 피어나온다. 대조적으로, 세상 삶에 넋이 헝클어지면 하얀 종이 위에 글·그림(文) 갈기듯 얼굴도 어지럽다. 일전에 어느 TV가 소위 ‘마약 왕’의 얼굴을 방영하였다. 그의 첫 생업은 수산업이었고, 그 당시의 그의 얼굴은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였다. 마약에 손을 대면서 그의 얼굴은 무서운 악마로 바뀌었다. 전혀 다른 흉포한 얼굴이다. 일손이 얼굴 모습을 아주 다르게 바꾸어놓은 것이다. 

“정치인들은 어떤 얼굴을 지니게 될까?”
속셈이 다 비치어 보여도 태연스레 염치없고 뻔뻔스런 철면피(鐵面皮); 쇠로 만든 낯가죽이 된다. ‘돈 봉투’에 큰 소리 내는 얼굴. 몇 사람 죽어가도 자신은 전혀 ‘모르는’ 관계라는 표정. 심지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조금도 간지럼 없이 전국을 쏘다니며, 오히려 법원 판결이 잘못된 것이라고 되받아치는 얼굴. 코인에 코가 꿰어도 아픈 표정이 전혀 없는 국회의원. 표심(票心)이 보는 개연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철면들이다. 

표심(票心)들의 얼굴은 무엇이 다른가? 표심은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표(票)는 가리어 덮여있어서(襾아), 개표가 될 때까지 내보이지(示시) 않는다(襾아示시=票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의 물음에 ‘내가 찍은 사람은 된 사람이다.’라며, 시제(時制)에도 맞지 않는 대답을 한다. ‘잘 난 사람’이 아니라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얼굴(容)에서 가장 중요한 새김은 용서(宥유)·용인(認인)이다. 굳은 표정은 용서가 아니다. 우선 스스로 용서하라. 그러면 잘못을 용인하는 용기가 나온다. 용인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진다. 부끄러움(恥치)은 귀(耳이)에 마음(心심)이 붙어있어서, 귀밑까지 붉어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라. 잘못을 지적받으면 개도 꼬리를 내리며 인정한다. 용인(容認)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예(禮)는 얼굴모습에서 시작된다(禮文始在於正容體)<禮記>. ‘무슨 낯으로’ 걸어 다닐까? 낯 갖춤이 삶의 근본이다. 큰 기교엔 교묘함이 없다(大巧無巧術). 술수를 쓰는 그 순간 졸렬함이 드러난다(用術者乃所以爲拙).<菜根譚>

잔 꾀 부려 세상을 속이려 말라.
표심은 철면의 속셈을 환히 본다.
저지른 잘못에는 낯붉힐 줄 알라.    
얼굴엔 조상모습 무늬로 남아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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