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평화를 위하여
오키나와의 평화를 위하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5.1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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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수필가

며칠 전 ‘동양의 하와이’라고도 불리는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오키나와는 한국, 중국, 대만과 가깝고, 특히 제주에서는 직항 비행기로 1시간 5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해변이 아름답고 나무들은 푸르름으로 반짝거렸고, 꽃들도 가는 곳마다 반겨주었다. 

오키나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지금의 오키나와를 더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오키나와는 14세기 무렵부터 17세기까지는 독립왕국이었다. 10세기 무렵부터 오키나와 섬에는 씨족을 중심으로 세 왕국이 있었는데, 1492년에 통일되면서 비로소 류큐(琉球) 왕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류큐 왕국은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러나 17세기 초 규슈 남부의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략했다. 그 후 1879년에 메이지 정부에 의해 오키나와 현으로 되면서 독립왕국의 역사는 끝났다. 

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치열한 지상전이 오키나와에서 벌어진다. 그때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반인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한국에서 징병으로 끌려온 사람들도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의 총알받이가 된 셈이다. 전쟁 후 오키나와는 1945년부터 무려 27년간 미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닌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오키나와는 일본에 속해 있으나 여러 가지로 일본 본토와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곳곳에 미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지만, 오키나와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한다.

그들이 세운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가장 먼저 한국인 위령탑을 찾았다. 돌로 무덤 형태를 크게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위령탑을 세우고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 위에는 향로와 누군가 바친 꽃다발, 학종이를 접어 길게 끼운 다발이 놓여 있었다. 재단 앞에는 원형 광장을 만들었다. 광장 바닥에는 한국 방향을 가리키는 큰 화살표가 있다. 전쟁 당시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한국 쪽을 바라보며 고국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잠시 묵념을 하려고 하는데 한 분이 배낭에서 소주를 꺼내 재단 위에 올린다. 다른 한쪽 돌벽에는 당시 한국인 희생자가 1만 명이나 된다는 글과 함께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75년에 세웠다는 글이 있다. 이은상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며 뭉클했다. 맞은편 잔디밭에는 당시에 희생당한 사람들 이름을 새긴 비가 길게 서 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영혼들의 넋이라도 이곳에 편안히 잠들기를 빌었다. 언젠가 희생자 모두의 이름이 비에 새겨질 날이 오긴 올 것인가. 오키나와 평화자료관은 이른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다. 평화기념공원을 돌아 나오며 제주의 4.3 공원을 떠올렸다.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길 염원하듯 오키나와도 평화의 섬으로 오래오래 남아있길 기원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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