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곰탕집
5월의 곰탕집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5.1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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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에서 어버이날로 이어지던 5월 첫 주말 연휴 때. 어느 곰탕집에서 본 모습이다. 80대 할머니, 40대 중년 남성과 30대 후반쯤 된 여인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관광객은 아닌 듯, 낡은 회색 잠바와 수수한 간편복에 얼굴빛도 밝지 않다. 한 가족인 것 같은 데도 전혀 말들이 없다.

40대 중년은 ‘보통’ 곰탕을 시키라는 할머니 말을 뿌리치고 수육이 많은 ‘특’곰탕을 세 그릇 주문한다.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기 그릇속의 수육을 한점 두점 골라내며 40대 중년의 그릇 위로 올려놓기를 시작한다. 40대가 몇번 손사레치다가 만다. 그러자 30대 여인이 자기 그릇속의 수육을 집어내어 할머니 그릇으로 옮긴다.

한번 두번 또다시 한번. 이런 손을 잡고 말리는 할머니의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아들, 며느리일까. 아니면 어머니와 아들, 딸일까. 그들이 떠나고 난뒤 한참 동안, 세사람 얼굴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어른어른 했다.

문득 몇해 전에 병원에서 본 어떤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놈아, 네가 어떻게 내 앞에서 이럴 수 있니? 이걸 먹어, 이 놈아!”하고 소리치던 할머니. 지팡이를 짚은 그 할머니는 홀어미로 살면서 어렵게 기른 외아들이 병마에 쓰러져 의식불명이 된 채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자 울부짖고 있었다.

털썩 병실에 주저 앉은 할머니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어디서 사왔는지. 할머니가 가져온 수육과 포장 은박지. 간호사들도 치우지 않아 그날 병상 옆에 오래동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이후 은박지에 싼 고기를 볼 때마다 그 할머니 생각에 멍 때리는 일이 많았다.

▲곰탕집을 뒤로하고 거리를 걷는 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서울에 올 때마다 하숙집에 있는 나를 불러내어 곰탕집에 갔다.

광화문 근처 어디었을까. 그 곰탕집에서는 큰솥에 소곱창, 양, 소고기를 넣어 끓이고 있었는데, 진한 국물냄새와 느끼한 국물맛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즈음 기름을 걷어내어 깔끔한 맛을 내는 곰탕과는 달랐다. 아버지는 곰탕이 얼마나 몸에 좋은 것인지 길게 설명을 하곤 했는 데, 그때 나는 정말 그 국물이 싫었다.

그런 내 눈치를 안 아버지는 수육을 추가로 시키고는 연신 내 밥그릇 위에 수육과 빨간 깍두기를 얹어줬다. 그러면 나는 무슨 생색이나 내듯이 곰탕 수육을 받아 먹었다.

▲이젠 나도 곰탕 맛을 안다.

곰탕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음식이다. 따뜻한 곰탕 한 그릇이 일상의 어려운 일과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 같다.

향기 좋은 대파와 후추를 곁들인 곰탕의 맑고 깔끔한 육수와 토렴된 밥알의 매끄러운 느낌과 맛을, 새우젓으로 잘 담근 깍두기와 함께 한 그릇 뚝딱 먹고 나면 절로 훈훈한 기운이 난다.

“(우리 아이가) 말 끝에 향내 나고, 남의 눈에 꽃이 되게 해주소서.”

이 말은 인터넷에서 본 어느 아버지의 기도문이다.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말이 5월 카네이션 꽃 향기만큼 아름답다.

늙어가면 아버지가 그립다고 한다.

사실 ‘그립다’는 말은 너무 정직해서 다만 가슴이 아릴 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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