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사슴(白鹿(潭)) 거린(居隣)에 있는 거린사슴오롬
흰사슴(白鹿(潭)) 거린(居隣)에 있는 거린사슴오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5.1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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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거린사슴
거린사슴 정상의 너럭바위와 철쭉꽃 피는 봄날 백록담을 감싼 왕관릉이 빛난다.
거린사슴 정상의 너럭바위와 철쭉꽃 피는 봄날 백록담을 감싼 왕관릉이 빛난다.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한라산을 횡단해 1100고지 휴게소를 지나서 멀지 않은 곳에 거린사슴이라는 오롬이 있다. 서귀포시 대포동 산2-1번지에 있는 이 오롬은 해발 743m, 비고 103m이다. 1100고지휴게소에서 서귀포를 바라보며 급하게 구부러지는 1100도로 노변에는 주차장도 있고 상점 바로 옆에는 오롬으로 가는 조붓한 오솔길도 나 있다.

지난 겨울, 큰길을 따라서 끝까지 가 보니 길은 끊기고 철조망이 있어서 철조망을 넘어 무작정 낙엽 진 오롬 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잠든 윤노리나무·두릅·청미래·보리수나무 등의 가시와 넝쿨에 긁히고 찔리고 미끄러지며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눈 앞에 하얀색 밧줄이 보여서 따라가니 수월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겨울을 보내며 옷 벗었던 라목들은 저마다 이제 새 옷을 입기 시작한다. 윤난(때죽나무)·산딸나무가 대다수이고 굴피나무·담팔수·산 벚나무들도 보이고 당단풍도 몇 그루 보인다. 곰솔 나무·굴거리·참식나무·꽝꽝나무는 여전히 푸른 잎이지만 노랗게 새잎을 피우거나 연둣빛으로 새잎을 피우기도 한다. 다른 오롬과 달리 나무 아래는 자금우도 산죽도 없는 것이 이상하다.

봄이 왔는데도 이 산에는 고사리도 산나물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늘진 곳에는 독초인 천남성이 많이 보인다. 만주 백두산에서는 흔히 보이나 제주 오롬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너삼 한그루를 처음 보았다. 지난 봄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참꽃나무가 종종 보인다. 한 보름을 넘기면 발갛게 피어날 텐데 아쉽다. 아직은 푸른 잎만 피우고 있으니….

거린사슴은 제2횡단(1100도로)에 인접해 교통이 좋고 또한 주차장도 있다. 그러니 탐방로와 둘레 길을 만들면 1100도로를 오가는 여행객이나 잠시 산책하려는 인근 서귀포 시민들에게는 30~40분이면 오르내릴 수 있는 좋은 곳인데 개발하지 않는 이유가 오히려 궁금하다. 오롬 길을 따라가니 가파르지 않아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정상을 오른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 고군산과 서귀포 시애가 아련하게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 고군산과 서귀포시 시내가 아련하게 보인다.

정상에는 큰 너럭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아래서는 이 오롬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산철쭉이 바위 주위에 피어나니 신기한 일이다. 정상에서 보는 두 가지 뷰 중 하나는 백록담이 바로 눈앞이다. 백록담을 바라보니 탄성이 나온다. 또한 아래로는 서귀포 시내가 한라산보다 훨씬 더 멀리 보인다. 정상 굼부리 위에는 서쪽으로 나가는 정상 둘레 길도 열려 있다.

이제까지 거린사슴을 일컬어서 ‘사슴의 등을 닮았다’, ‘달려가는 사슴의 형세와 비슷하다’, ‘사슴이 많이 살았다’는 등으로 얘기해왔으나 아니다. 거린사슴의 유래와 어원은 밝힐 수 있는 별칭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절악’이다. ‘악(岳)’은 산, ‘절’은 한국어 절이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몽골어의 절(사원)을 가리키는 ‘도간(дуган)이라 쓰지 않고 ‘절’이라 썼다.

이웃한 볼래오롬에는 존자암, 법정오롬에는 법정사가 있었다면, 거린오롬에도 남방불교의 ‘거린사’가 있었을 거다(필자는 이 셋을 한라산남3사 본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도간(дуган)’이라 쓰지 않고 ‘몽골어로 절(ЗОЛ)(명사, 운수·행운)’이라고 음차(음을 차용)표기했던 것 같다. 어쩌면 비가 많은 이 지역에서 날씨가 맑으면 실제로 ‘운수(행운)’가 좋아서 한라산 백록담이 환해 ‘절(ЗОЛ·운수좋다)’하고 감탄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별칭으로 ‘아록(AAЛУГ)악(岳)’이 있다. 이는 감탄사 ‘아AA!’와 몽골어 ‘록(ЛУГ·부사, 두근거리다·고동치다·뛰다)’라는 뜻이다. 몽골(元)이 한풀 꺾인 조선시대 이르러 지도에 표기할 때 이 오롬을 ‘거린악’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거주(居住)하다의 거(居)와 백록담(白鹿) 사슴(潭)과 거린(居鄰)에 있다’ 하여 ‘거린사슴’이라 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를 더한다면, 클 거(巨)와 기린(麒麟), 린(麟)으로 볼 수 있다. 기린(麒麟)은 목이 긴 기린이 아니라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영험한(용(龍)과 같은) 짐승을 말한다. 기린, 린(麟)은 큰사슴의 수컷이나 빛나는 모양을 말하기도 한다. 저녁 햇살에 백록담은 빛나지만 큰 숫사슴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흰사슴(白鹿)도 전설 속의 동물임이 확실하다.

빛 좋은 봄날 오후. 전망대에서 서귀포를 관망한다. 멀리 앞바다와 그 위로 각시바위와 고군산도 보이고 서귀포 앞바다에 떠도는 섭섬·문섬·범섬도 아련하다. 멀리 서남쪽으로는 절오롬(산방산)과 절워리(송악산)까지 보인다. 거린사슴에서 아침을 맞는다면 일출을 볼 것이요, 해 질 녘이면 황혼을 볼 터인데 아쉽다. 조금 더 기다리며 황혼을 볼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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