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가장자리에서
정원의 가장자리에서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5.0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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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 시인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날, 아들과 엉또폭포로 향했다. 폭포의 장관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안개에 가려 볼 수가 없다. 힘없이 내려오다가 정원이 딸린 카페 ‘감따남’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한라봉주스를 마시다가 테이블에 놓여진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두툼한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이다. ‘타샤의 정원’은 낱낱이 알고 있었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은 생소하다. 남편과 함께 가꾸었다는 정원을 훑어보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 ‘정원의 가장자리’(Ege of the Garden)가 떠오른다. 다른 시대 같은 공간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하루에 한 번 꽃을 꺾어 집안에 꽂아두는 여자, 하지만 50년 후인 지금 그 집을 산 주인 정원엔 꽃이 없고 집안에 꽂아둔 그 생생하던 장미꽃도 시들어 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과거에 사는 한 여자가 미래에 사는 한 남자를 만나 안타까운 마음들을 편지에 담으며 사랑하게 되고 그 우울 함들을 견뎌내는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함축할 수 있다. 

드라마 ‘별’에서도, ‘도깨비’, ‘호텔 델루나’에서도 반복되는 생에 거듭되는 만남을 지켜보며 의아해했지만, 이 영화를 보며 다시 인연의 법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저 얽혀진 것이 아니라 먼 과거로부터 비롯되어 먼 미래로도 이어질 소중한 인연이라는…

운명과 우연과 감정의 조율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호흡이다.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고 정답은 없지만, 매번 높낮이, 부피, 촉감, 형태가 다르다. 그건 산을 오르는 산악인처럼 물살을 가르는 선장처럼 익숙하지만, 매번 낯선 늪인 것이다.

버지니아울프의 불행한 죽음이 의문들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을 여행한 것도 우연인듯 운명인듯 가슴이 뛴다. 1919년부터 22년 살았던 몽크스 하우스의 정원을 2000년부터 입주한 캐롤라인 줍이 10년 넘게 정원을 가꾸며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이 탄생되었다는 것도 놀랍다. 한 번쯤 직접 거닐고 싶어진다.
연이어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도 ‘헤르만 헤세, 나무들’도 영화 ‘디 아워스’도 여행할 예정이다. 나에게 책이나 영화는 달콤한 여행이므로.

나의 정원에 빛바랜 의자가 하나 있다. 그 가장자리로 스며드는 빛살들이 나를 흔들기도 하고 눕히기도 하고 견디게 하기도 한다. 나만의 정원에 오늘은 음악과 커피 한 잔과 시집 한 권이 있다. 그 외에는 모두 방해물인 양.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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