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에 통속과 신파가 결합된 작품”
“이념에 통속과 신파가 결합된 작품”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4.2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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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파는 처녀(황토 1989)

1930년 연극으로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영화로 재창작, 北 대표적 공연물로 자리
꽃 파는 처녀(황토 1989) 표지.
꽃 파는 처녀(황토 1989) 표지.

어릴 적부터 살던 집 부근의 헌책방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때 그 시절의 작은 동네 헌책방들은 이런저런 사연과 함께 다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곳은 거의 없다.

그나마 대학 시절부터 다니던 책방들 가운데 몇 곳은 지금도 같은 장소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

그 중에서도 헌책과의 인연으로만 따진다면 단연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서울 용산역 근처에 있는 한 헌책방이다. 

대학 입학 후부터니까 벌써 거운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고도 남을 세월을 함께 했다. 한동안은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해서 한때 내가 가진 책들 상당수가 그 책방 출신(?)이기도 했다.

책방 입구에 단군 초상화를 걸어 놓으셨기에 헌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다들 눈치 채셨으리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예의 믹스커피를 권하시는 바람에 어떤 날은 커피로 배가 부른 지경(?)에 이를 때도 드물지 않았고 그 커피와 더불어 고른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저렴해 지는 에누리 인심도 후하셔서 책값보단 어떻게 집에 들고 갈지가 더 걱정스러운 날들이 더 많았었다. 

그런 분이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지셔서 마음이 아팠던 게 몇 년 전이었는데 얼마 전 어머니도 같은 병으로 쓰러지시고 나니 엊그제 불현듯이 생각나서 용산으로 향했다.

2대 책방지기인 아드님과 서로 간의 동병상련을 나누다 보니 동종업종 종사자로서의 고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 그날 요즘은 보기 드문 책 몇 권을 골라왔는데 오늘은 그 책들 가운데 한 권을 소개해 보련다.

꽃 파는 처녀(황토 1989) 표지의 민중판화가 유연복의 채색 목판화.
꽃 파는 처녀(황토 1989) 표지의 민중판화가 유연복의 채색 목판화.

바로 북한의 장편소설 ‘꽃 파는 처녀’(황토 1989)다. 이 작품은 원래 1930년 만주 오가자에서 김일성의 지도하에 ‘대중계몽연극’으로 창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72년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혁명가극과 영화로 재창작된 후 ‘피바다’와 함께 북한의 대표적인 공연물이 됐다.

그때 만들어진 영화는 그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18회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당시 중국에서는 관람객이 너무 많아 24시간 순환 상영하는 극장이 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 내가 중국에 있을 땐 길거리 해적판 영화CD 노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었다.

그런 공연물이 1977년 4·15창작단에 의해 장편소설로 개편돼 북한의 문예출판사에서 출판된 단행본을 저본으로 ‘원문 그대로’ 발행해 북한 인쇄물 특유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게 바로 이 책이다.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창작과 지도로 만들어진 항일무장투쟁기의 혁명예술을 지칭하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거나 ‘북한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이 책을 문학평론가 조성면은 ‘계몽과 선전이라는 혁명문학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독자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적이고 대중적인 스토리에 외국문학을 텍스트의 목적과 흐름에 맞게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인 대중적 소설, 곧 이념과 통속과 신파가 결합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비록 요즘은 찾는 이도 거의 없지만 북한 특유의 붉은 글씨체 표제나 판화가 유연복의 채색 목판화로 장정된 표지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꾸 ‘그때 그 시절’ 운운하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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