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과 발의 전쟁
신발과 발의 전쟁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4.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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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KBII 한국뷰티산업연구소 수석연구원

신발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추위나 더위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한 도구이다. 즉, 신체의 쾌적함을 유지하려는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인류가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복식을 발명하여 사용하였듯이, 신발도 발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는 신발을 신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다. 발의 보호기능에서부터 계급을 나타내기까지 신발은 최초의 실용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추위를 극복하고 뜨거운 햇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만들어졌듯이, 신발 역시 동상을 방지하기 위해 혹은 바닥의 열기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추운 곳과 뜨거운 사막 지역에서 먼저 발전하게 되었다. 신발은 나무껍질이나 풀, 짐승의 가죽이나 털을 이용해 발을 묶어 싸던 것에서 시작하여 차츰 정해진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신발은 기원전 20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抵草 (파피루스)로 엮은 샌달 모양의 것이라고 알려졌다, 원래 샌달이란 어원은 그리스어로 샌달리온 (널판지란 뜻)이었으나 영어화 되면서 샌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발은 대부분 샌달 모양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구두의 견고성을 찾기 시작한 것은 오랜 전단에 시달리던 십자군 운동 때 부터이다.

하이힐의 유래는 19세기경 이탈리아 베너치아에서 여성들이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즐겨 신었으며 그 풍속은 프랑스 영국 스페인 독일 등에 전해졌다 그랑시의 힐은 초핑(chopin)으로 명명되며 나막신위에 낮게 자른 샌들의 조합 형태로서 복장의 장식 과잉이 신게 된 동기이며 긴 스커트 속에 가두어 시녀의 도움으로 보행이 가능했다고 한다. 현재의 하이힐과 같은 형태 의 신발은 이탈리아의 캐더린리라는 처녀가 프랑스의 올랑 공락 후에 프랑스의 왕 헨리 2세와 결혼하기위해 여행 할 때 특별히 맞춘 구두에서 비롯된다.

구두의 디자인은 이탈리아 장인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작고 아름다운 그녀의 키가 커보이도록 후에 그녀의 매력은 뭇 사나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곧이어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의 귀족들에게 대중화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온갖 장식을 한 화려한 신발이 유행하였고 미싱이 발명된 산업 혁명 때 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서양신발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신발을 가죽을 주로 썼으며 때론 비단이나 천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서민들은 나막신의(sabot)도 많이 신었다고 하며 유럽의 농노들이 일년 농사를 지어 자기 상주한테 바치고 나면 겨우 풀 쓸 양식밖에 주질 않자 여기에 반항하여 새싹을 나막신을 신고 밟아 죽였다고 하여 사보타지란 말이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 신발의역사는 부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꼬또“는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발이다. 삼한시대엔 삼으로 엮은 미투리가 나왔고 신라시대엔 놋쇠로 만든 놋갓신을 왕이 신었다고 하는데 백제 무열왕릉에서 철로 된 청동 신발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유래됐다는 당혜가 이조말엽까지 신겨졌는데, 서민들이 짚신이나 나막신을 신었다면 당혜는 왕족이나 벼슬아치 양반들이 신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조상 신발 중 특히 가죽으로 만든 마른신은 외쪽, 오른쪽 구별이 없어 장시간 보행으로 불편했고 가죽은 주로 노루가죽을 훈제하여 신발로 신었다고 한다. 원래 신발은 부식이 빨라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선 후기 것이 대부분이고 이전시대는 단지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 서양구두가 처음 들어온 때는 고종황제가 단발령을 내리고 서양 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로서 서양구두는 주로 일본의 기술이 도입되면서 만들어 졌고, 이화학당이나 동덕학원의 학생들에 의해 일반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우리나라 구두의 어원은 퉁그스어, `고또`에서 유래된 사실을 보아도 우리나라 신발 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혜, 미투리, 진신, 나막신 등 갖가지 신발의 모습 속에 우리는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엿보게 된다. 신발전은 지금의 동대문 시장 근처에 있었으며 신발가격은 그때 당시 백 오십냥 정로 한사람이 하루 두켤래 정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구두는 한국전쟁 후 군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보기 시작했는데 일부에서는 미군화를 뜯어서 만들었으므로 너무 투박했다. 그 때문에 여자들은 가죽을 얇게 해서 그 자국으로 다시 제작하여 만들어 신기도 하였으나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 물자 속의 양질의 구두가 쏟아져 나옴으로써 멋쟁이 여성들은 그 구두들을 많이 애용했다.

80년대에는 여성은 높은굽을 대신하는 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스포츠가 일상화되면서 생활이 간편해지고 클래식한 스타일의 플랫과 낮은굽을 선호하고, 정장에서 캐쥬얼이 크게 유행하였다. 90년대에는 구두는 소수의 스타일에 한정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스타일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활동을 통한 다른 스타일의 신발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새로운 유행에 따라 변신하는 신발 디자인은 첨단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 기술에 힘입어 다양하고 기능적인 혁신을 추구하며 더 이상 겉모양만으로는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디자이너들은 편하게 신고 활용할 수 있도록 앞다투어 인체공학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발이 만들어지기 전 인류는 맨발로 다니고 생활했으며, 점차 생활 환경이 바뀌면서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발이 생겨났다. 걸어 다닐 때 여러 가지 장애를 방어하기 위하여 신발이 생겼지만 그러다 보니 패션성이 강해지면서 기능성보다 디자인이 중요시되어 갈수록 발의 기능을 무시한 형태가 되고 있다. 외관만 다양해질 뿐 본래의 역할인 발의 보호에 중점을 둔 신발의 선택이 매우 절실한 시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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