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흙 밭 위에 정상도 붉은 주체(朱體)오롬
참흙 밭 위에 정상도 붉은 주체(朱體)오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4.2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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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주체오롬
앞에서 볼 때는 작은 동산 같아도 올라보면 작지 않은 주체오롬(남쪽에서 본 전경).
앞에서 볼 때는 작은 동산 같아도 올라보면 작지 않은 주체오롬(남쪽에서 본 전경).

산골 마을 덕천지경을 감싸던 구름이 걷히며 하나둘 오롬들이 머리를 내민다. 벙거지를 썼던 오롬은 벙거지를 벗고, 앞서 벙거지를 벗은 오롬들은 목도리 풀어 얼굴을 내민다. 고사리비가 그치고 나니 고사리 꺾는 이들이 멀리서도 확연하다. 바야흐로 제주는 봄의 절정이다.

주체오롬은 구좌읍 덕천리 남서쪽으로 조천읍 선흘리와 경계를 이룬다. 덕천리에서 보면 주체오롬은 오롬이라기보다 ‘머들’로 보였다. 머들은 화산 분화 시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화산 분화 시 돌들이 쌓이고 그 위에 흙이 쌓이고 쌓인 흙 위에 나무나 넝쿨들이 자라나서 작은 오롬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머들을 보고 “오롬이 아니냐?”고 묻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덕천리의 주체오롬을 가려면 작은 오솔길을 따라 숲을 지나고 밭 뚝을 지나야 한다. 오롬 입구에는 무를 심었는데 무를 뽑았는지 말았는지 구별되지 않는다. 농민들의 한숨을 보게 된다. 또한 보랏빛 아련한 무꽃이 4월의 슬픔을 더 짙게 한다. 듬성듬성한 무밭 틈틈이 주홍색 참흙이 군데군데 드러나 보이니 이 오롬이 주체오롬이라는 게 맞아 보인다.

밭과 오롬을 경계 짓는 철조망을 넘는다. 작은 골을 지나 오롬을 오르며 보니 골 아래로 점점 골이 깊어지고 푸른 물 감춘 곶자왈 아래 남서쪽으로는 넓지 않은 오롬 등성이가 뱀 등 같아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뱀 등 아래로 깊은 곶자왈이 보인다.

오롬을 올라 보니 꽤 큰 도토리나무와 볼레낭(보리똥나무)들이 정상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 보니 제주에서는 초가집을 덮는데 사용하는 황세들이 바람에 쓰러져 길게 드러누웠고 큰 나무 아래를 보니 잡초 우거진 빈 풀밭이다. 정상에 비인 곳은 붉은 빛 황토들이고, 큰 나무 그늘에는 이제 막 올라오는 길고 통통한 검붉은 고사리들이 있어 한참 동안 고사리를 꺾는다.

고사리를 꺾으며 보니 오롬 아래서 올라오며 꺾은 고사리들은 모두 푸른색 청고사리와 하얀색 백고사리인데 주체오롬 정상에서 한참 동안 꺾은 고사리는 모두 검붉은 고사리들이다. “아 주체오롬은 흙이 붉으니 고사리도 붉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눈으로 체험하게 됐다.

주체오롬 정상에서 북쪽 편으로는 동복리 붉은 지붕들과 풍차단지 너머로 북쪽편 바다까지 보인다.
주체오롬 정상에서 북쪽 편으로는 동복리 붉은 지붕들과 풍차단지 너머로 북쪽편 바다까지 보인다.

주체오롬은 다른 이름으로 ‘흙붉은오롬’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주토악(朱土岳)’ 또는 ‘주체악(朱體岳)’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朱)’는 ‘붉을 주(朱)’로 “붉다·붉은 빛·붉은 빛을 띤 물건·적토赤土’를 말하는데 누런 빛이 짙을 때는 주황(朱黃), 붉은 빛이 짙으면 주홍(朱紅), 또는 수은과 황으로 만든 붉은 빛 고급 물감을 말하기도 하며 붉은 비단은 주단(朱緞)이라고 한다.

이 오롬은 붉은 송이 때문에 붉다고 하지만 이 오롬의 북서쪽 곶자왈과 남동쪽은 참흙 밭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 송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오롬을 주토악(朱土岳)이라는 것은 단순히 송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여 년 전에 인근의 골프장에서 이곳의 흙을 파가서 문제가 됐다는 말은 이 오롬뿐 아니라 제주 전역이 개발과 보존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미 오롬으로서 그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곳이 많은 것이 제주오롬의 현실이다.

제주오롬들은 같은 이름들이 많은데 이후 정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흙붉은오롬도 두 곳이 있으니 그런 예에 속한다. ‘애월읍 흙붉은오롬은 700년 전 삼별초난 때 김통정 장군이 전사하면서 피를 흘렸는데 그 피가 오롬을 적혀서 흙이 붉다’는 스토리가 제주도의 전설로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이후 오해를 불식하려면 ‘주체오롬’이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주체오롬 정상에서 보니 동쪽으로는 한동리의 둔지오롬과 송당리 오롬들과 조천읍 선흘리에 속한 알바매기 오롬 등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한라산과 한라산으로 나가는 오롬들이 줄줄이 보인다. 바로 눈 앞의 북쪽 편으로는 동복리의 풍차단지가 보이고 그 앞으로는 붉은 지붕들이 연이어 보인다. 아마도 외지인들의 사용하는 세컨드하우스들로 보인다.

주체오롬을 입구 쪽에서 바라보면 조그만 동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오롬을 오르고 보면 작지 않다는 것은 느끼게 된다. 북쪽 편 머리로는 비탈져 작은 숲을 이루고 동쪽 등은 농사짓는 붉은 참흙 밭 위에 뒹군다. 서쪽으로는 깊은 곶자왈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버티는 모습인데 그 꼬리는 남쪽으로 스르르 꼬리를 감추고 있다.

주체오롬의 식생은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참나무·도토리나무가 정상을 점하였는데 볼레낭이 다른 곳보다 크고 많은 편이다. 어린 담팔수나무·아외나무 사이에 키 큰 구릿대가 누렇게 사그라졌다. 퀴카시(구지뽕)·찔레가 옷깃을 잡아당기는데 먹고사리를 꺾다 보니 봄날이 간다.

주체오롬 서쪽은 깊은 골짜기 아래 푸른 빛 봄이 익어간다.
주체오롬 서쪽은 깊은 골짜기 아래 푸른 빛 봄이 익어간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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