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끝내 못가지’…전설의 시집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끝내 못가지’…전설의 시집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4.2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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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풀빛 1984)

금서 지정 탄압 속 100만부 이상 팔려
민중 판화가 오윤의 작품도 실려 눈길
노동의 새벽(풀빛 1984) 각종 판본.
노동의 새벽(풀빛 1984) 각종 판본.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하루는 자주 드나들던 동묘의 한 헌책방에 갔더니 사장님이 보여줄 게 있다고 하셨다. ‘이게 진짜기만 하면’ 하시면서 꺼내신 건 한지(韓紙)에 찍힌 민중 판화 계열의 목판화 한 점이었다.

작가의 사인이나 낙관이 없어서 작가가 누군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보는 순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누구 작품일까 궁금하던 차에 목소리를 낮춘 사장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전설의 민중 판화가 오윤(吳潤)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시집 한 권에 민중 판화가 두 점씩 붙어있어 유명한 한 출판사의 판화시선(詩選) 시리즈가 떠올랐다.

그 생각이 들자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자세히 살펴보니 판화의 위아래와 왼쪽 면이 잘려나간 듯 부자연스러워서 내 눈에는 원작이 아니라 인쇄된 것으로 보였다.

내 생각을 사장님께 말씀드리니 그 시리즈에 수록된 판화들은 이렇게 한지에 찍은 것이 없다고 단언을 하셨다.

수십 년 헌책방 경력을 가진 분의 확신에 찬 말씀과 그때까지 내가 소장했던 그 시리즈 판화작품들 가운데 한지로 된 게 없었다는 얄팍한 경험치(?)에 기대어 당시 그 작품은 일단 아리송한 것으로 결론짓고 말았다.

노동의 새벽(풀빛 1984)에 수록된 시 ‘노동의 새벽’.
노동의 새벽(풀빛 1984)에 수록된 시 ‘노동의 새벽’.

그 후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다가 얼마 전 그 해묵은 궁금증들이 해결될 수 있었다. 그 작품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한지에 찍힌 채로 말이다. 오늘은 그 책을 소개해 보련다.

바로 ‘70년대 이래 이 땅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현실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노력한 고통의 결실’이자 ‘80년대 민중시의 절정’(채광석)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집 ‘노동의 새벽’(풀빛 1984)이다. 

필명조차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문구에서 따오고 한동안 ‘얼굴 없는 시인’으로 활동했던 박노해(본명 朴基平)의 첫 시집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탄압을 받으면서도 암암리에 100만부 이상 팔렸다는 전설의 책이다. 

출판 직후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이 시집을 원하는 독자가 많았기에 추가로 인쇄한 것을 감추기 위한 탓인지 모두 9월 25일에 발행되었다는 초판 판권이 붙어있고 이는 판화가 없는 ‘풀빛시선’이나 있는 ‘풀빛판화시선’ 모두에 해당되는 현상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수록된 판화의 재질이 달랐던 이유는 책의 날개에 수록된 정보를 통해 추정컨대 한지로 된 건 초기에 소량만 제작된 한정판(?)이고 지금 종종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두터운 백지에 인쇄된 건 나중에 추가로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건으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년 6개월의 수감생활 끝에 1998년 특별 사면된 시인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지만 출소 후 이전의 치열한 노동운동가에서 평온한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로 변신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변절’이라 비난하고, 또 어떤 이는 ‘진화’이자 ‘성장’이라고 옹호한다지만 2004년에는 그의 시에 공감한 음악인들이 대거 참여해서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까지 나온 걸 보면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던 시인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긴 변신이 아니라 ‘돌(연)변(이)’한 이들도 허다한 요즘이다.

노동의 새벽(1984) 풀빛판화시선판에 수록된 민중판화가 오윤의 작품.
노동의 새벽(1984) 풀빛판화시선판에 수록된 민중판화가 오윤의 작품.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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