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 깔린 모래가 바람을 맞으면 운다는 명(鳴)사십리
해변에 깔린 모래가 바람을 맞으면 운다는 명(鳴)사십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4.0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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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섬에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품은 신지도(薪智島)
이세보가 유배 생활동안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바닥에 글을 썼다는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
이세보가 유배 생활동안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바닥에 글을 썼다는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

# 드넓은 쪽빛 바다에 3.8㎞ 달하는 명사십리 해수욕장 눈길

제주에서 완도로 갈 때 여서도를 처음 만나고 다음 청산도, 왼쪽으로 보면 소안도, 대모도를 지나면 정면에 완도와 오른쪽 보는 섬이 신지도(薪智島)다. 섬이 길게 뻗어 있고, 섬 중심에 우뚝 선 상산(象山·342m)이 가까이 보이면 완도항에 도착한다. 신지도는 완도와 연결된 신지대교가 2005년에 개통됐고, 2017년 11월에 고금도 상정까지 이어진 장보고 대교가 개통돼 이제는 섬 아닌 섬이 됐다.

드넓은 쪽빛 바다에 3.8㎞에 달하는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해진 섬이기도 하다. 명사십리란 이름의 해수욕장은 우리나라 섬 지역 여러 곳에 있다. 함경도 원산에 있는 송도 해수욕장이 명사십리 해수욕장 원조다. 대부분 ‘밝은 모래’라는 뜻으로 명사(明沙)라 부르고 있지만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모래가 운다’는 전설이 있어 울 ‘명(鳴)’자를 쓰고 있다. 이런 사연은 조선 철종때 사회의 부정부패를 과감하게 비판했던 이세보가 신지도로 유배왔다. 그는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유배의 설움과 울분을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바닥에 시를 쓰고 읊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우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세보(1832~1895)는 460여 수의 시조작품을 남긴 대표적 문인으로 다수의 애정 시조를 창작했다는 점에서 학계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1851년 경평군이라는 작호를 받으며 벼슬길에 올라 연행단 정사로 중국을 다녀오는 등 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안동 김씨 세력을 주축으로 한 관료들의 탄핵으로 1860년 29세 나이로 3년 동안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가 남긴 ‘신도일록’은 유배과정과 생활을 기록한 한글 일기로 당시 이세보가 겪었던 심적 고통이 생생하게 녹아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세보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선고받아 주변을 돌아보는 최소한의 일상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단절된 일상 속에서 고독과 두려움의 시간을 보냈던 이세보의 복잡 미묘한 감정과 해배(解配)에 대한 열망이 한글 일기인 ‘신도일기’에서 확인된다. 조선 후기시대의 한글 일기에 해당하며 사실적 기록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과 감정을 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한다.

/가슴의 불이 나니 애간장이 다 타네/인간의 물로 못 끄는 불 없건마는/내 가슴 태우는 일은 물로도 어이 못 끌까!/나날이 다달이 운우지락에 사랑하며/산골짝 맑은 물이 증인 되고/천년 만년이자 맹세했건만/못 보아도 병, 더디 와도 애가 끓는 구나!/

이세보의 상사별곡(相思別曲) 사연을 듣고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가며 귀를 기울여 소리 들어보니 신비한 울림 같은 느낌이 든다. 많은 섬이 그렇듯신지도 역시 조선 시대 유배 섬이었다.

신지도에 또 하나의 해수욕장은 섬 끝자락 동고리 마을에 있는 동고리 해수욕장이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있는 곳이 신지도 중심마을이고, 여기서 동쪽으로 가인재를 넘어가면 길가에 오래된 해송 숲이 길게 늘어지고 그 앞이 동고리해수욕장이다. 이 해변에는 300여 그루 해송 숲이 방풍림과 방사림 역할을 하고 있다. 해안에 무인도인 갈마도, 소등도, 구무섬이 있는데 구무섬은 일명 혈도(穴島)로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음력설 전날 밤, 머리에 바구니를 쓰고 이 섬을 향해 두 번 절하면 소원을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신지도 항일항쟁 기념비
신지도 항일항쟁 기념비

#서남해 항일운동 전초기지

신지도라는 지명유래도 코끼리 코처럼 동서로 길게 생겨 ‘지섬’이었으나 나주의 ‘지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지도’라고 했다고 한다. 섬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상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 다도해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 같아 좁을 농로를 사방으로 돌아다녔으나 등반로를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마을 밭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가보니 빵떡 배추를 캐고 있다. 제주에선 퍼데기 노물이라는 배추로 눈맞은 다음 먹으면 맛있다는 배추로 육지부로 판매되고 있다며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다.

마을 중심 언덕에 신지도 항일기념탑이 서 있다. 신지도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인 소안도와 함께 서남해 항일운동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신지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사립 신지학교였고, 이 학교를 불온시 여긴 일제에 의해 교원 2명이 경찰에 체포된 후 강제 폐교당했다. 신지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임재갑, 장석천 선생. 임재갑은 신지도 임촌 출신으로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청년학우회와 구국청년계몽회에 가입해 연락 요원으로 서울과 북간도를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했다. 장석천 선생은 신지도 송곡 마을 출신으로 신간회 광주지부 상무간사로 활동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장재성, 박오봉, 강석원 등과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여 학생운동을 치르다 경찰에 체포되어 두 번 옥고를 치뤘다. 항일기념탑에는 이들의 기록을 상세히 적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 명단과 기록도 상세히 적고 있다.

유배의 섬에서 우리나라 서남해 항일운동 전초기지였던 신지도, 그동안 수없이 다녀갔지만 명사십리 해수욕장만 생각했지 이런 역사적인 현장의 섬인 줄은 이번 취재에서 알게 되며 마음이 뜨거워진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쏟아지고 있다. 배가 출항할 수 있을까? <서재철 본사 객원 大기자>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장보고 대교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장보고 대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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