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한 들판 진드르에 널 덮은 봉분 같은 번널오롬
번번한 들판 진드르에 널 덮은 봉분 같은 번널오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3.3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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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번널오롬
유채꽃과 벗꽃이 어우러진 녹산장 진드르 동녘 끝에 자리잡은 번널오롬.
유채꽃과 벗꽃이 어우러진 녹산장 진드르 동녘 끝에 자리잡은 번널오롬.

번널오롬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로 위치해 있으며 가는 길은 제주시에서 번영로를 지나 대천동 4거리에서 우회전해 비자림로에서 좌회전해 녹산장 길로 가거나 제1횡단도로에서 비자림로, 우회전해 녹산장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녹산장 길은 한국 사진사 협회가 뽑은 명소로 전신주의 지하설치를 청원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쩌든 전신주가 없으니 시원한 전망이 끝내준다.

녹산장 길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한항공 항공관, 그 뒤로는 족은녹(麓)오롬과 큰녹(麓)오롬이 있고(사스미는 잘못된 명칭임) 그 뒤로 따라긴오롬이 있다(따라비도 잘못 된 명칭임). 그 반대편은 가시리 풍력발전단지가 있는데 이 풍력단지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유채꽃 단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오롬이 번널오롬, 그 뒤의 오롬이 병곳(안좌)오롬이다.

번널오롬은 표선면 가시리 산 10번지, 이웃한 병곳(안좌)오롬은 산 8번지이다. 앞서 안덕면 광평리(너븐드르)가 대관령 같은 곳이라면 서귀포시 동쪽의 대관령 같은 곳이 바로 가시리 진드르(진평동(陳坪洞))라 할 것이다. 1914년 정의군 동중면이 생기며 지금의 남원읍 수망리, 신흥리까지 병합되면서 이전에는 ‘안좌리’라고 하던 것이 ‘가시리’라 불리게 됐다.

이 오롬 역시 명칭과 유래는 아직껏 밝히지 못하고 있다. 제주 최초로 ‘오롬 나그네’라는 책에서 제주 오롬을 소개한 고(故) 김종철씨도 ‘이 오롬의 유래나 어원은 분명치 않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중국과 몽골에서 20여 년간 살며 연구해온 입장을 밝힌다.

번널오롬은 풍력단지·유채꽃 큰잔치가 벌어지는 ‘진드르 들판’ 서쪽 끝에 있다. 번널·반널오롬의 ‘반’은 ‘반반하다’라는 뜻인데 제주어로는 ‘번번허다’라는 말이다. 이는 ‘표면이 구겨지거나 울퉁불퉁한 데 없이 고르고 평평하다’, ‘물건 등이 겉보기에 좋고 쓸 만하다’라는 의미로 ‘반반하여 고르다’라 할 때도 쓰이며 ‘빤빤하다’라는 말은 같은 뜻의 거센말이다.

몽골어 ‘반즈(ӨРҮҮЛ)’는 판자·널빤지·납작한 나무토막을 말한다. 한자어 ‘빠안~지/빠안~즈’ bǎn zǐ,zi도 판자(板子)’에서 온 것이다. ‘널’은 지금도 제주에서 쓰이는 두꺼운 판자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널판자’라고 하나 제주에서는 중국처럼 ‘널빤지(널판)’라고 한다.

제주에서는 망자의 관을 짤 때 널(판자)로 만들어진 관에 시신을 모시고 하관을 하는데 그 깊이와 길이와 폭과 높이 만큼 흙을 파서 관을 내리고 그 위에 다시 널을 덮는데 이 넓은 판자(횡대(橫帶))를 덮는다. 그 위에 만장을 덮고 상주들이 취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동그란 봉분을 만든다. 번널오롬은 이처럼 제주의 ‘묘 쓰기’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번(반/빤/판)과 널’은 같은 말이다. 예로서, ‘역전(驛前)은 한자 역(驛)+전(前)+앞’, 빵떡은 포르투칼어 팡(pão)+떡, 모찌떡은 일본어 모찌(もち)+떡, 빙떡은 한자 빙(餠)+떡, 라인선은 라인(Line)+선으로 중복된 말이다. 이는 부정적으로 ‘언어적 사대주의 영향’이나 긍정적으로는 원어를 번역한 친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주어적 의미로는 어감상 ‘반널오롬’도 나쁘지 않다.

진드르는 6㎞ 이상 되기에 한국어 ‘길다’라는 말의 제주어 ‘진’과 ‘들판’의 제주어 ‘드르’의 합성어로 ‘긴 벌판’인데 대관령처럼 높은 곳에 있다. 반반(제주어 번번)은 구김 없고 울퉁불퉁한 데 없이 고르고 평평하다’라는 의미다. 번번한 들판의 번(반)+널(판자를 뜻하는 한자·몽골어·제주어)=‘번널’이 되므로 ‘번널오롬’이라 불러 왔으니 무방해 보인다.

번널오롬은 녹산장 길에서 남서쪽으로 200m쯤 들어가서 90도 방향을 틀어 서쪽 자락을 타고 오르는데 소형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길이다. 오래전에는 탐방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좁은 길이 나 있으니 그 길을 따라간다. 아마도 이 오롬 정상에 산불 감시초소가 있어서 이 샛길이 이렇게라도 보전되는 것 같다.

번널오롬 정상에서 동북쪽으로는 진드르 풍력발전소와 유채꽃 들판이 눈부시다. 북동쪽으로는 하얗게 불 밝힌 10리 벚꽃 길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족은녹오롬·큰녹오롬·따라긴오롬·모지오롬·영르오롬(영주산)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토산오롬·가세오롬·매오롬·도청오롬·표선 앞바다까지 보인다. 해 질 녘이면 물영아리·여문영아리·한라산 너머로 황혼이 아름다운 오롬.

필자는 해마다 4월이면 녹산장 길을 드라이브한다. 제주에 산다는 게 얼마나 꿈 같은 일인지. 봄을 피워 올린 노오란 유채 아가씨, 그녀를 덮어주는 왕벗꽃 총각, 그 사이 오롬 길에 안긴 붉은 동백이 시샘하는 녹산장 길, 녹산장 길을 모르고 제주의 봄을 말할 수 없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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