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쇠테우리의 일기
어느 쇠테우리의 일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3.28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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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

어렸을 때의 기억이지, 글공부를 잘 못해서 동내 소와 말들을 몰고 뒷동산 풀밭을 찾아다니며 땅따먹기놀이 하던 기억이지, 

그럴 때마다 소 떼와 말 떼들은 나보다 먼저 자유의 풀밭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지,

머리 좋은 녀석들은 잘 익은 보리밭으로 몰래몰래 튀어들어 여문 곡식과 덜 여문 곡식을 재빠르게 골라 배불리 훔쳐 먹기도 했었지, 

그러다가 남은 곡식은 허리에 찬 책 보따리에 싸들고 학교 운동장을 달리듯 먼 산 향해 돌고 도는 도망질도 했었지, 

그것도 눈치 못 챈 우리 집 누렁소는 들판의 풀잎이 녹색인지 청색인지 아니면 빨강색인지 조차도 구분하지 못 한 체 해종일 허기진 배만 붙잡고 하늘천 따지 자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향기 없는 풀잎만 물어뜯고 있었지, 

그럴 때마다 속이 탄 한라산 산허리엔 겨우내 숨죽였던 마른 덤불마저 참지 못 해 산불로 일어나 새빨갛게 타들어 간 세상은 온통 빨강물이 들고 말았지, 

어쩌나! 건너편 밭곡식 훔쳐 먹고 재빠르게 도망하던 그 녀석, 불길 피해 산속 깊이 숨어든 그 녀석, 

하늘 천 바라보며 푸른 하늘 은하수 노래 부르던 녀석은 불타는 산허리 어디쯤엔가 숨어들어 몸을 피했던지 이듬해 봄 터덜터덜 산비탈을 내려와 학교 운동회 날이면 그래도 언제나 일등만 해서 내 속을 태우더니 오늘 내 기억 속 그 녀석은 이제 여기에 없고 잊혀진 그 자리,

제주 4월의 푸른 하늘 은하수는 뉘 집 이름 모를 작은 무덤 위에 핀 앉은뱅이 유채꽃 되어 뜻 모를 언어로 쇠테우리 일기를 쓴다,

어제 신문에서 읽은 제주소식이지, 한 걸음에 달려가도 모자랄 마음이지만 시집 보낸 딸년 집 첫 방문이라 무더운 여름의 마지막을 뜨거운 가슴으로만 마주한 고향 땅 제주,

문득 가을꽃에 물든 오메기떡이 생각나서 그리움 대신 그 떡 한 차롱 빚어 보내드릴까 하다가, 

오 마이 갓! 

가을이 깊을수록 우리들 마음의 울타리에도 홍시는 익어 여름내 나누지 못 한 달달한 목숨을 한 숨 한 숨 따서 그리운 잎에 말아 음력 팔월 대보름달 편에 띄워 보내드린다면, 

내 안에 겨울이 온다 한들 하얀 달빛으로 덮여 따뜻할 거라는 생각에 송이송이 눈꽃송이를 그대의 창에도 매달아 맑고 밝은 아침 되게 한다면, 

어느새 내 눈물샘에 고인 깊은 밤도 훌쩍 밝아 오늘은 그 차디찬 겨울비 멈추려는지, 

그러면 봄의 향기도 곧 열리려는지, 

아마도 그러면 세상천지 벚꽃들도 만개할 거라, 

때맞춰 우리들 마음도 활짝 열릴 거라, 

다투던 사람들도 서로를 사랑하게 될 거라, 

꿈꾸듯 모두를 그리워할 거라, 

춘삼월 지나 사월이면 더더욱 그러할 거라, 

꿩바치 총소리에 놀라 겨우내 숨어 살던 새끼 꿩도 보리밭 덤불 속을 마음 놓고 헤쳐 나와 너와 내가 넘었던 그 보리 고갯길로 쫄쫄쫄 엄마 쫓아 건너올 거라, 

모든 세상일이 그리될 거라, 어제 신문에서 읽었던 제주소식도 아마 그 소문일 거라.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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