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븐드르 동쪽, 가시덤불에 쌓인 족은대비오롬
너븐드르 동쪽, 가시덤불에 쌓인 족은대비오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3.2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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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족은대비오롬
족은대비 쌍둥이 분화구와 그 위로 보이는 왕이메등성이.
족은대비 쌍둥이 분화구와 그 위로 보이는 왕이메등성이.

서귀포시 안덕면 너븐드르(廣坪里)에 5개 오롬 중 서북쪽에 세 개의 오롬은 왕이메·괴수치·톰박이오롬들이다. 또한 그 맞은편에 두 개의 오롬이 있는데 북동쪽의 이돈이오롬, 남동쪽의 족은대비오롬이다. 너븐드르에서 보면 이 다섯 개의 오롬이 한눈에 보인다. 그런데 ‘큰대비악’은 없는데 ‘족은대비악’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너븐드르는 안덕면에서 제일 서북쪽에 자리 잡은 고산지대다. 강원도에 비교한다면 대관령 같은 곳이다. 너븐드르 북쪽에 세 개의 오롬(왕이메·괴수치·톰바기)은 마치 하나의 오롬처럼 보인다. 개오리나 윗세오롬에서는 이를 나눠 큰오름·셋오롬·족은오롬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세 개가 저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큰대비오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위 세 개의 오롬이 족은대비오롬에 비교한다면 큰대비오롬인 것이다. 그래서 큰 대비오롬은 없으나 족은대비오롬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족은대비오롬 앞으로 1115번도로인 산록남로가 가로 지나가지만 그 옛날 여기는 너븐드르 남쪽 끝이다.

이 오롬은 한자로 대비악(大庇岳)·족은대비악(朝近大妣岳)으로 쓰였다. 그래서 전설에는 ‘대비라는 선녀가 이 오롬에서 놀다 갔다고 하여서 대비악(大庇岳)’이라고 하였다는데 어이없는 얘기다. 이는 ‘비(庇)’자가 덮을 ‘비(庇)’자로, ‘덮다·감싸다·돕다·의탁하다’라는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 본다. 그러나 너븐드르에서 보면 다소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이 오롬을 탐사해보면 ‘선녀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오롬은 푸른 빛 인동초가 가끔 눈에 띄지만 퀴카시(구지뽕)·찔레·가마귀쥐똥 등이 모두 회색빛이다. 제주도 오롬들 중에 이 오롬처럼 가시덤불에 쌓인 오롬은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가시덤불 사이에 겨우 지날 만한 사잇길이 있어서 그 길을 따라가 본다.

가시덤불 중에는 신기하게 화살나무들이 꽤 보인다. 제주 오롬에 작살나무는 흔하나 화살나무는 아주 희귀하다. 한 그루 팥배나무가 보인다. 봄이 오면 환히 꽃을 피울 것이다. ‘대비악(大批岳)’이라 하면, 천벌을 받은 선녀가 가시나무 속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된 모양으로 ‘대비(大批)’는 ‘손으로 때리다·밀치다’의 뜻이니 선녀와 연관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모두 말장난이다.

오롬 등성이에 오르는 데는 마른 고사리와 억세들이 길을 막는데 올라보니 몇 그루 굴피나무와 까마귀 쥐똥나무 등이 고작이다. ‘향교 훈장 하공’의 묘가 굼부리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 잡았다. 족은대비오롬은 복합형 오롬이라고 하는데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같은 높이의 쌍둥이분화구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런 분화구의 형태는 손지오롬의 경우와 비슷하다.

북서쪽으로 왕이메가 보이는데 굼부리를 감싸는 깔때기꼴의 등성이가 보이지 않아서 사진을 찍어보니 족은대비오롬 등성이로 보인다. “아하! 이래서 ‘족은대비오롬’이라 하는구나!” 생각이 든다. 깔때기 없는 이 오롬을 ‘맞대어 비교하니(對比) 작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너븐드르 너머 동쪽은 산록남로가 있고 길 건너는 남서쪽으로도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상천1길이 상천로까지 쭉 뻗어서 상천마을로 들어간다. 하지만 왕이메 세 개 오롬과 족은대비오롬 주위에는 온통 골프장과 골프장에 속한 리조트들이 포위하고 있다. 그 외의 들판은 모두 큰 목장들이다. 어쩌면 그 목장들도 이 동네 제주인의 것은 아닐지 모른다.

오롬 굼부리로 들어가서 관찰하려고 했으나 온갖 가시들이 갈고리나 송곳 같고 마른 억새 풀은 날카로운 칼날 같아서 헤집고 다니기 어렵던 차에 조붓한 사잇길이 보여 빠져나와 버렸다. 그러나 오롬 입구와 북서쪽으로는 이 오롬의 경계인 듯 쭉 뻗은 삼나무들이 무성하다.

여기가 ‘목호의 난’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들이다. 4·3사건 당시에 사망한 사람들은 제주 인구의 3분의 1 정도(10만명)라고 한다(소나무사 발행, ‘4·3항쟁’). 당시 제주 인구는 약 30만명이라고 하는데 미국인 존 메릴 교수의 증언(온누리 발행, 잠들지 않는 남도)은 7~8만이 죽었다고 한다. 그것이 내전(內戰)이든 외전(外戰)이든 제주는 한 많은 섬이다.

족은대비오롬은 지금 가시덤불 속에 있지만, 그 옛날은 비탈진 이 오름에도 방애불을 놓고 목초가 자라면 쉬(소와 말) 때가 한가로이 풀을 뜯던 곳이리라. 그러나 600년 전, 목호의 난을 치른 후에도 4·3사건 전까지는 방애불을 놓으며 안덕면 사람들이 목초지로 사용했을 곳인데 지금은 가시덤불에 사로잡혀 해방될 날을 기다리는 듯 가시덤불 속에 잠들어 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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