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의 상흔을 되새기게 되는 길
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의 상흔을 되새기게 되는 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3.2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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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제주 한림 금악마을 4·3길(1)
금오름·정물오름·누운오름·세미소오름과
넓은 초원 등 고수목마 풍경 자랑하던 마을
향사·학교·풍부한 물로 중심이 된 벵디가름
금악리 출신 항일 독립 항쟁기 기록 안내판
금악리교차로 주변 벵디가름.jpg
금악리교차로 주변 벵디가름.jpg

■ 고수목마의 풍경이 펼쳐지는 마을

한라산 정상에서 서쪽을 보면 바다에는 비양도가 떠 있고 그 안쪽 넓은 들판으로 배부른 암소가 누워있는 모양의 큰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이 바로 금오름이며 그 주변 넓은 평야가 펼쳐진 마을이 금악리다.

정물오름, 누운오름, 세미소오름이 금오름을 호위해 좌우에 들고 나는 나지막한 동산들이 펼쳐지고, 넓은 초원 위에는 말떼들이 모여들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고수목마(古藪牧馬)’로 영주십경의 한 풍경을 자랑하던 마을이다. 금악리는 한림읍에서는 제일 높은 산간지대로 해발 230m 고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명월, 두모, 사계리 일대에 논밭을 소유한 분들이 많았고, 축산으로 생활터전이 굳건한 부촌이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희망찬 삶의 터전을 닦던 중 1946년 콜레라 발생으로 이웃마을 간에 왕래가 금지되어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1948년 4·3을 겪으면서 마을이 혼란 속에 차차 붕괴되기 시작했다. 11월 18일과 20일 사이에는 해안마을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마을은 불바다가 되어 삶의 터전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된다.

벵디못에서 본 금오름.jpg
벵디못에서 본 금오름.jpg

■ 토벌군에 시달리던 시절

1948년 10월 하순, 토벌군들은 대정면 일대를 공격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금악리를 덮쳐 주민 9명을 잡아다 총살시킨다. 이 토벌 작전은 새벽에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마을 출신 몇 분이 무장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금오름 주변 산악지대가 무장대의 아지트로 활용되면서 진작부터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토벌대는 자주 마을을 습격했고 주민들은 그때마다 피하기에 바빴다. 주민들은 마을 어귀나 오름에 보초인 ‘빗개’를 세웠는데, 빗개는 토벌대가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 주민들이 신속히 대피하도록 했다.

금악리를 덮칠 때마다 주민들이 모두 사라져 허탕을 치던 토벌대는 밤중에 미리 마을을 포위했다가 1948년 10월 26일 새벽에 작전을 개시했다. 날이 밝아오자 토벌군은 총을 쏘아대며 집집마다 들이닥쳐 미처 피신하지 못한 주민들은 금악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주민들 중 젊은이들을 가려내 모슬포 주둔지로 끌려가 모슬봉 서쪽 굴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집단학살 당했다. (이상,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④’에서)

만벵디 위령비.jpg
만벵디 위령비.jpg

■ 금악마을 4․3길

금악마을 4․3길은 금오름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 ‘웃동네 가는 길’과 ‘만벵디 묘역’을 축으로 하는 북쪽 ‘동가름 가는 길’로 나누었다. *모든 안내 표기엔 모두 ‘벵듸’로 표기되어 있는데, 제주어 표기법이 시행되면서 ‘듸’ 발음이 인정 안 되어 이 글에서는 무두 ‘벵디’로 표기한다.

‘웃동네 가는 길’은 지금의 금악초등학교 주변 벵디가름에서 출발하여 중가름에서 하르방당을 들르고, 오소록이동네, 할망당, 웃동네를 거쳐, 한창로(1116번 도로)를 지나 생이못과 금오름, 포제단을 둘러보고 마을 중심 벵디못으로 돌아오는 7㎞인데 약 3시간이 소요된다.

‘동가름 가는 길’은 포제단과 벵디못 사이에 있는 코스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새새미와 동가름을 들르고, 새가름을 거치면서 각생이내(내 이름)를 따라가 만벵디 묘역을 참배한 후, 처녀당, 포크빌리지와 궤동산을 거쳐 벵디못으로 돌아오는 5㎞에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금악리사무소와 경로당.jpg
금악리사무소와 경로당.jpg

■ 마을의 중심지가 된 벵디가름

제주어 사전을 보면, ‘벵디’는 ‘넓은 벌’, ‘가름’은 ‘마을 안의 구분된 거리’를 뜻한다. 벵디가름은 옛날 금악리 넓은 들판을 거치는 길이 모아졌던 곳이다. 지금은 금악리 교차로와 금악삼거리, 금악리사무소, 금악리경로당, 금악초등학교 등이 몰려 있다.

안내판에는 ‘벵디가름은 향사와 학교 그리고 풍부한 물이 있어 사방으로 길이 생겨나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동네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여 4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가운데 나무를 중심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심어져 있었다.’로 시작된다.

4․3 당시 이 나무들 중 먹구슬나무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매달려 고문을 당했고. 며칠 후 울창했던 나무들은 모두 베어지고 향사와 학교마저 불에 타 사라진다. 지금 월대의 나무들은 마을을 재건한 후 심은 나무들이라 한다.

한쪽에 한림청년회의소와 당시 북제주군에서 광복 51주년을 기념하여 세워놓은 ‘금악리 출신 항일 독립항쟁기’ 안내판에는 애국지사 박주석과 강봉환의 항쟁기(抗爭記)가 나온다. 박주석(朴周錫)은 진도에서 태어나 일찍이 제주에 건너와 선도교(仙道敎) 교주로 금악리에 본적을 두고 교리를 전도하다 법정사(法井寺) 항일항쟁 때 붙잡혀 옥사한 분으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또 애국지사 강봉환(姜奉煥)은 이 마을 금악리 출신으로 법정사 항일항쟁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치르고 귀향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1944년에 영면하신 분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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