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魁殊)와 몽골어 치(ГЧ)의 결합인 괴수치
괴수(魁殊)와 몽골어 치(ГЧ)의 결합인 괴수치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3.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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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괴수치오롬
너븐드르 푸른초원에서 바라보면 중간에 있는 오롬이 괴수치 오롬이다.
너븐드르 푸른초원에서 바라보면 중간에 있는 오롬이 괴수치 오롬이다.

괴수치는 안덕면 광평리 산79번지에 있는 오롬으로 해발 558.1m, 산 높이는 왕2메 92m, 괴수치 59m, 통반이 51m로 차이가 크지 않다. 제주시에서 평화로 1135길→교차로→산록남로1115길→광평교차로에서 직진해 조금 더 가서 만불사로 좌회전하는 좁은 길이다. 만불사에서 통반이를 거쳐서 자연스럽게 가거나 초원에서 바로 갈 수도 있다.

한라산 1100고지 서남쪽 안덕면은 동북쪽 돌오롬·영아리·하늬보기·마보기·어오롬 등을 품은 상천리가 있고 그 서쪽에 광평리가 있다. 광평(廣坪)리의 ‘광(廣)’은 ‘넓다, 넓히다, 넓어지다’는 뜻이고 ‘평(坪)’은 ‘평평하다, 평(땅의 면적)’을 뜻하는 말이나 본디 제주어로 ‘너븐술드르’, ‘너븐곶(ㄱ+아래아+ㅈ)드르’인데 여기서 ‘술’과 ‘곶(ㄱ+아래아+ㅈ)’은 숲을 가리키나 지금은 ‘술’이나 ‘곶(ㄱ+아래아+ㅈ)’을 더하지 않는다.

19세기까지도 이 마을에 대한 기록은 없었는데 20세기(1904년) 들어서 드디어 나타난다. 대정군 중면 ‘너븐드르을’은 14호로 남자 50명, 여자 51명이 ‘삼군호구가간총책’에 최초로 등장한다. 너븐드르에 붙었던 ‘술’과 ‘곶(ㄱ+아래아+ㅈ)’이란 제주어는 ‘수풀(林)’이란 말인데 지금 이 오롬들은 식재된 삼나무가 주이고 소나무와 편백도 조금 있으나 제주산 토종나무들은 많지 않다.

4·3 당시 너븐드르(廣坪里)는 ‘잃어버린 마을 조가웨’가 모두 불타고 사라졌으며 바로 이웃 동광리의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도 모두 불타고 사라졌다. 이 마을들이 불탈 때 해안으로 도피한 사람들은 살았으나 목호의 난 당시도 너븐드르 숲으로 피했던 사람들은 최영 장군 휘하들에게 붙잡혀 괴수로 지목되고 이 들판에서 처참하게 죽임당했을 것이다.

당시 ‘조가웨’는 고배기동산 일대에 조씨 촌을 이루어 살았다. 조씨들은 700년 전 원나라(몽골)에서 제주로 이민 온 15개 성씨들 중 하나다. 필자가 조사한 15개 성씨들 중에는 조천면 교래리 ‘돔베오롬’ 일대의 송씨, 구좌면 한동리 둔지오롬 일대의 좌씨, 애월면 수산오롬 일대의 진씨 등이 그러한 경우나 목호의 난, 4·3 이후로 이들의 집성촌은 와해 되고 말았다.

괴수치 동북쪽은 맏형격인 왕2메, 서남쪽 끝에는 통반이 중간에 있다. 세 오롬은 열지어 있다. 왕2메는 동부 왕메(대왕산) 다음으로 서부의 목마 중심지이다. 괴수치는 그런 왕2메와 통반이오롬과 양쪽 자락을 맞대고 있다. 그러면 ‘괴수치’란 명칭은 어떻게 생겼을까?

혹자는 이 오롬에 “고수치란 사람이 살아서 고수치라고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씨 촌’은 이해되나 한 개인이 오롬 명으로 쓰인 예는 없다. 구좌읍 송당리 ‘선죽이오롬’은 ‘선죽이’란 사람이 살아서 선죽이가 아니다, 필자는 그 오롬 앞(先)에 대나무(竹)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선죽(先竹이)’라고 밝혔다. 또한 괴수치의 유래를 찾으려고 수차 오롬을 오르고 몽골어를 찾았다.

그러나 괴수치란 몽골어이기보다 한자 괴수(魁殊)+몽골어 치(~ГЧ)의 혼합명사로 보인다. 괴수(魁殊)의 ‘괴(魁)’는 ‘으뜸·우두머리·수령·크다·선구(先驅)’의 뜻이고, ‘수(殊)’는 ‘죽일 수(殊)’로 ‘죽이다·사형에 처하다·정하다·결심하다·끊어지다·단절되다’라는 뜻이다.

몽골어 치(~ГЧ)는 직업·직위 등으로 간호사는 소빌락치(СУВИЛАГЧ), 유모·보모는 아스락치(АСРАГЧ), 수반·수장·우두머리는 테르구-울렉치(ТЭРГҮҮЛЭГЧ), 또는 털거일럭치(ТОЛГОЙЛОГЧ)라 한다. 한국에서도 ‘저 ~치는 나쁜 놈이야’ 할 때나 ‘양아치·갓바치·뿌락치’나 ‘제주에서 거지를 ‘동냥바치‘, 염부를 ‘소금바치’라 하는 것도 몽골어로는 다르나 거기서 따온 말들이다.

700년 전 목호의 난에서 고려 장군 최영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당시 제주 인구의 절반으로 전해진다. 고려 정부군(최영)에게 있어서 목호의 난 수장은 ‘괴(魁·우두머리)요, 잡힌 바 된 반란의 수장은 고려군에게는 단연 ‘수괴의 수(殊·사형 당할 자)’였다. 괴수치란 명칭은 700년 전 목호의 난 상황을 잘 말해주는 데 몽골도 한국처럼 한자어를 많이 차용하는 점은 비슷하다.

괴수치 정상에서 보니 너븐드르 초원에서 보이던 오롬 등성이 북쪽에는 아덴힐리조트에 속한 빨간 지붕들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왕2메가 바로 눈앞이다. 너븐드르에서 괴수치는 바로 올라보니 탐방로도 없고 삼나무는 빽빽한데 비탈진 능선이 미끄러워 탐방이 쉽지 않다.

괴수치는 좌우의 왕2메, 통반이와 식생이 비슷한데 굼부리 등성이와 안에는 토종 굴피나무가 가득하다. 원형 굼부리 둘레는 400여 m, 깊이 30여 m인데 몇 년 전에 볼 때는 한라산 왕관릉이 보이고 서남쪽 파란 절오롬(산방산) 너머로 반짝이는 제주 바다가 슬프도록 눈부셨는데 오늘따라 짙은 황사로 아득한 주변이 숨겨진 역사를 감추고 쉬려는 하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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