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신, 헤파이토스
예술의 신, 헤파이토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2.2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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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작곡가·음악평론가·논설위원

군대에 다녀와서 대학을 다닐 적에 입학을 같이한 동급생들은 모두가 상급생이 돼 있었고 수업이 다르기 때문에 전혀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는 얼굴이 전혀 없어서 하루에 말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그럴 바에는 도서관 출입을 하자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매일 도서관을 찾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술에 관계되는 책을 보다가 예술의 신 ‘헤파이토스’에 관한 책을 보게 됐다.

책에서 소개를 한 내용을 보면 ‘헤파이토스’는 예술의 신으로서 뭇 신들과 교제를 잘 하지 못 하는 존재였다. 그는 ‘얼굴이 찌글어져 있으며 언제나 남루한 옷을 입고, 몸에서는 냄새가 난다. 신발도 다 헤어져 발가락이 보일 정도이고 헤파이토스가 나타나면 모여서 대화를 나누던 신들이 모두 흩어져 가버린다. ’고 쓰여 있다.

신들이 기피하는 대상인 ‘헤파이토스’, 예술의 신의 존재가 뭇 신들의 조롱감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정상적인 신들과 같이 지내지 못 하고 신들로부터 외면하는 대상이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꽤 오랜 세월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학을 마칠 때 까지 금긍증은 해결을 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왔다.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세상에 뛰어 들었지만 예술의 신의 정당한 모습을 이해를 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오랜 세월동안 창작을 해 오면서 ‘헤파이토스’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해 왔다. 오늘 날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내용에 관한 서적을 알고 있다 손치더라도 반드시 ‘헤파이토스’와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내가 살아가는 형편에 맞게 생활을 하고 창작을 하는 것,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해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허나 ‘헤파이토스’의 형상을 묘사한 것이 단순하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부유하게 살거나 생활의 모든 것을 잘 갖추어 살면서도 예술작품에서도 같은 부유를 누린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있을 수 없는 일기도 하다. 어떻게 현실에서 부를 누리면서도 예술에서 조차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같은 창작의 길에 서 있는 많은 창작들과 그 길을 걸어가려는 청년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의 신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걸어가는 인생 길 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 세계를 여하히 잘 걸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녹록지 않은 현실의 생활, 가정을 갖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금전·경제적인 생활은 무엇 보다 중요한 사안이다. 결혼을 해 자식을 낳고 학교를 보내고 학원 등을 보내기 위해서는 즉 자식이 원하는 것들을 시키려고 하면 많은 경제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아무리 예술이 좋다 하지만 가족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가장으로서의 입장과 체면을 내세우고 싶을 것이다. 당당하고 픈 가장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만 지는 힘 없이 사라지는 현실의 상황을 보고 있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우리는 ‘헤파이토스’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존재인 ‘헤파이토스’, 어쩌면 그리스 시대의 ‘헤파이토스’의 모습은 오직 예술만을 위한 세상을 살아가는 예술가를 말함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예술만을 위한 예술은 오늘 전혀 가고픈 마음이 없는 것이다. 적당한 수준에 머무는 예술의 가치, 누구에게 탓을 돌릴 수는 없어도 그렇다고 그냥 주저 앉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예술, 자기의 창작은 나름으로 자신이 결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수 밖에는 없다라는 생각을 해 본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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