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활동의 추억
봉사활동의 추억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2.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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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작곡가·음악평론가·논설위원

군대를 다녀온 후 대학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는 대학 서클마다 방학이 되면 농촌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시하던 때이다. 나도 서클 임원을 하고 있던 터라 장소를 물색을 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학생들을 인솔해 내 고향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로 향했다. 사전에 이장님과 청년회장, 부녀회장을 만나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초등학교 두 교실을 잠자리로 이용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을 북쪽에 위치한 영주산 농로 약 200m의 길의 하수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말이 200m이지 한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작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매일 오전 오후로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또 마을에는 마을 중앙에 느티나무가 있어서 봉사활동 단원 중에는 미술대학 학생이 있어 마을 이정표를 그리고 그 곳에 표지판을 만들자는 계획으로 대형 마을 지도와 중요한 곳들을 표시한 마을 표지판을 며칠 동안을 수고해 작업을 끝냈다. 그리고는 동산 위의 느티나무 아래에 세웠다.

일주일의 봉사활동을 끝내고 면장님과 이장님 마을 어른들의 수고하셨다는 격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중문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모두가 탁 트인 바다를 보자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서 힘들었던 봉사활동에서 해방된 기쁨을 서로 격려하였다.

이렇게 제주의 봉사활동을 끝냈다.

또 다른 봉사활동은 3학년 겨울 방학의 일이다. 경남 합천면 합천읍으로 봉사활동을 가게 됐다. 써클인 KC(Keimyung Congress) 회원들 20여 명을 인솔하고 농촌 마을로 갔다. 내가 써클의 회장을 맡고 있어서 방학이면 언제나 연례행사인 농촌봉사활동은 참가할 수 있었다. 남녀학생 20여 명은 대체로 많은 숫자이다. 낮에는 마을의 길을 넓히는 일을 하고 밤에는 마을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학업을 도와줬다.

그러면서 멤버들이 휴식을 하는 시간이면 합창을 하면서 힘이든 시간을 위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우리들은 대단히 노래를 잘 불렀던 같다. 어떠한 노래도 모두 화음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음악대학 성악 전공자들이 몇 있었지만 통상적으로 노래는 화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멤버들 중에는 키-타를 잘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 친구 덕에 노래할 때 반주는 그것으로 만족해했다.

마을 청년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졌었다. 당시는 마을 청년들은 대다수가 너무나 순수했다. 농촌 생활이 어떠한 지를 물어봐도 속 시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숫기가 없고 너무나 순박한 농촌 총각 처녀들이었다. 그래서 마을 청년들과 대화의 시간은 실패를 하기가 십상이었다.

같은 봉사 활동을 한 일행 중에는 영문과 학생이 있었다. 헌데 그는 봉사활동에는 관심이 없고 마을 집집마다를 다니면서 담금주(농주)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을 집집마다 다니면서 담금주를 찾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는 어쩌다가 찾게 되면 사정을 해서 담금 주를 마시곤 한다. 봉사활동이 끝나는 시간이 되어서 그는 혼자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한 대학 시절에 경험한 봉사활동. 마치 심훈의 ‘상록수’에 등장하는 청년들과 같이 열정적으로 농촌 살리기 운동에 최선을 다 했던 것이다. 이제는 추억으로 소개를 하는 농촌봉사활동. 이 경험들이 바탕이 돼 사회에서 그런대로 사회의 역군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추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 그러한 추억을 떠 올려 진다는 사실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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