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외버스 정담
시외버스 정담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2.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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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깨어 보니 창밖이 하얗다. 행사에 참석하려면 아무래도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 단단히 챙겨 입고서 나서려는데, 연기되었다는 문자가 카톡에 올라와 있다. 이왕에 껴입고 준비했으니 어디로든 외출을 강행하기로 하고 나섰다. 아파트를 나서며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남겨 보는데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사뭇 정겹다. 평소에는 운전하느라 창밖 경치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지만 오늘은 창밖 풍경을 맘껏 즐기리라 작정하고 기사님 뒷자리에 앉아 시야를 넓혔다.
  
마늘밭에 소복이 쌓인 눈과 길게 이어진 밭담의 가지런함, 힘껏 달려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데 언제부터였을까. 뒷좌석에서 할머니 두 분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 분의 이야기는 작은 소리로 오갔지만, 너무도 조용했던 탓이리라. 나의 두 귀는 성능 좋은 안테나가 되어 뒷자리로 주파수가 맞춰졌다. 
  
오래전 버스를 타고 다니던 시절을 추억하리라던 마음은 사라지고, 엿듣는 재미에 흠뻑 빠져든다. “메역이 풍년 들어싱고라 혼차 사는 늙신네 불쌍ᄒᆞ덴 이디저디서 ᄀᆞᆽ다 주난 시에 사는 아으덜 줘ᄃᆞᆫ 왐쑤다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며칠 전 어머니도 미역을 들고 우리 집에 와서는 바다에 미역이 풍년이라는 말씀을 똑같이 하고 가셨기 때문이다. 

옆집에 할망이 나이 생각 안 하고, 사나흘 당근밭에 다니다가 감기에 걸렸다며 링거를 맞았는데도 낫질 않는다고 걱정하시는 말씀에는 나 또한 공감하게 된다. 무심코 본 룸미러는 만만찮게 경청하는 또 한 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는 있지만, 운전기사님도 귀를 열어 할머니들의 동네 소식에 주파수를 맞춘 표정임이 분명하다. 잘못하면 소음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두 분의 대화는 오히려 정감을 느끼게 한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면 대화도 멈춰진다. 승객이 타면 기사님은 일일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안전벨트 꼭 매세요.” 버스가 출발하면 다시 할머니들의 방송이 시작되는데 전혀 운전에 지장이 없어 보인다. 눈 덮인 세상 아궁이에 남은 잉걸불처럼 따뜻하다. 김녕리에 왔을 즈음엔 기사님이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한다. 약속이나 한 듯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두 분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기분이 환해진다.

두 분이 기사님께 살가운 인사를 하며 내리고 난 후 버스 안은 고요하다. 매섭게 부는 바람에 찬찬히 발걸음 내딛는 뒷모습을 본다. 두 분의 이야기가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을 생각하고, 이웃을 걱정하는 대화 속에서 훈훈한 정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인사를 나누진 않았지만, 두 분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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