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今금)가 언제?  
‘이제’(今금)가 언제?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1.09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상호 시인·칼럼니스트

“이제(今금)가 언제?”

이 물음에 답하려고 시계를 보는 사람, 날짜를 생각해내는 사람; 각각이다. 

거북등껍질에 기록하던 시대(갑골문자)의 ‘이제(今)’은 식구들이 ‘모여(亼=集집) 숟가락을 쥔(ㄱ) 모습(亼·ㄱ=今)’이었다. 아침에 저녁끼니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저녁에 식구들이 각자 끼니거리를 지니고 들어온다. 저녁(夕석)늦게 들어오지 못 하는 식구가 있으면 애가 탄다. 그 식구를 일진(日辰/그날 운세/卜복)이 어느 밖으로(外외=夕석·卜복) 보냈는가? 저녁을 함께 할 수가 없다면; 그 밖(外)이 혹시 저 세상이면 달력 날짜가 무엇이며, 시계의 숫자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제(今금)’란 ‘식구들이 함께 모여(亼집) 식사하는(ㄱ) 때’이다. 

지난 가을 이태원에서 큰일 났다. 날벼락도 이럴 수가!? 상상할 수도 없었고 하기도 싫다. 달력은 해 넘겼는데, 마음은 그 상황에 묶이어 새해인데도 새롭지 않다. 바르게(正정) 바탕마련(攵복)함이 ‘나랏일 다스림(正·攵=政)’인데, ‘네 탓’으로만 둘러대는 혓바닥들은 창끝이다. 가뜩이나 여의사 출신 어느 야당 국회의원의 ‘현장 지원’에 대하여도 미디어가 시끄럽다. ‘옳았다·잘못됐다’ 가름을 듣고 싶지 않다. 필자가 편역·출판한 ‘채근담’에서 ‘나쁜 일 다음과 착한일 다음’을 싣는다. 

나쁜 짓 했다. 그런데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알까봐(爲惡而畏人知하면),
그 나쁜 짓 속에 오히려 있다; 착함으로 가는 길이(惡中猶有善路요).
착한 일 했다. 그런데 조바심 낸다; 남들이 알아 달라고(爲善而急人知하면),
그 착한일 속마음이 바로 나쁜 짓의 뿌리이다(善處卽惡根이니라).

못된 짓하고도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면, 그 마음 속엔 착함이 아직 남아있다. 반면에 착한 일 하고 나서 남이 알아주기 바라면, 위선(僞善)뿌리가 악(惡)으로 자란다. 

의사 출신 국회의원과 그녀를 에워싼 무리(黨)들은 ‘착한 일’ 했다고 떠든다. 왜 알아주지 않느냐고 되받는다. 착함(善선)이란 잘 구운 양고기를(羔고) 늙은 부모의 입(口구)에 드리는 것이다(羔고·口구=善). 남들은 모른다. 삼켜진 양고기는 뵈지 않는다. 부모의 마음에 ‘착하다·고맙다’ 기억으로만 남는다. 이태원 현장에 다녀온 그 국회의원 부부들의 행적은 어떤 기억으로 세상에 남겨지게 될 것인가. 선(善)일까, 위선(僞善)일까.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하늘(天)이 무너지는(崩) 아픔이라하여,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한다. 이 보다도 더 큰 아픔이 있다.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다 키워 놓고, 가슴에 묻는 아픔이다. 이를 참척지통(慘慽之痛)이라 한다. 아! 언제면 졸곡(卒哭)할꼬.

살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것은 무엇일까? 기도이다. ‘죽은 영혼은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 못 한다(천주교).’ ‘기도하시오. 기도하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시오(법정스님).’ 필자가 일상에서 빠뜨리지 않는 기도문은 ‘식사 전후기도’이다. 시작기도로써 이제(今) 저세상 영혼도 나와 함께(亼집) 숟가락(ㄱ)을 든다고 믿는다. 

이제(今), 마침기도 끝 구절;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