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숲에 머물다
환상숲에 머물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23.01.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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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 시인

시간 나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던 저지 환상숲에 다녀왔다. 

겨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중산간 마을의 정취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앙상한 나무들, 그 나무 위로 덩굴 이루는 하늘 레기가 치렁치렁 시선을 끈다.

환상숲에 들어서자 넓은 주차장, 작은 폭포가 흐르는 바위에 ‘환상숲’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상한 계절의 공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해설사의 환영 인사처럼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신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예전에 큰지그리오름, 작은지그리오름 휴양림에 들어섰을 때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는데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져 숲은 더 의미로운 장소로 다가왔다. 일단 공기가 신선했다. 바위를 뚫고 나온 나무들, 나무들끼리 서로 엉키고 꺾어진 풍광이 마치 원시시대로 진입하는 기분이다.

특이한 건 이 환상 숲이 스토리가 숨겨져 있는 숲이라는 것이다. 25년간 농협을 근무하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3년간 일구었고, 숲 해설가인 부인과 낙향한 딸과 사위도 합류하여 함께 만들어가는 곶자왈이다.

문득 3년 전 남편이 뇌경색 판정을 받고 힘들었던 시간이 떠오른다. 모든 걸 손에서 놓고 갈팡질팡하던 시기였다. 환상숲 가족처럼 돌밭이 아닌 기름진 밭이 있지만, 농사는 생각도 못 해본 터라 도전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무명의 존재로 잊혀질 것만 같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것 같아 초조했다.

생각 끝에 독서를 좋아하기에 글쓰기를 권해 보았다. 곶자왈을 일구듯이 글 밭을 일구면 되지 않겠느냐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 차차 마음을 열더니 남편은 펜을 들었다. 일기를 쓰고, 자연을 관찰하며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갈등이 있기에 숲이 풍요로워집니다.’라는 푯말의 글귀처럼 칡인 남편은 오른쪽으로 등나무인 나는 왼쪽으로 감아 오르며 글의 환상 숲을 엮는 중이다. 환상숲을 빠져나오며 ‘당신의 수고가 꺾일 수 있지만, 당신이 쌓아온 시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라는 글귀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마치 나를 위한 메시지처럼. 나를 스쳐 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조율해 보기도 한다. 

환상숲은 나무의 생명을 위협하는 덩굴마저 자연의 일부라며 소중히 여기는 사고의 전환이 위대해 보인다. 하찮게 여기던 나 자신의 가치를 한껏 끌어안아 본다. 세상은 혼자가 아닌 갈등을 딛고 조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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