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봉 토끼
사라봉 토끼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12.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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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너무도 유명한 윤극영의 동요 ‘반달’이다.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달에는 토끼 한 마리가 나무 아래서 떡방아를 찧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시 사라봉에도 언제부터인지 토끼들이 무리 지어 산다.

최근엔 개체 수가 상당히 불어난 느낌이다. 산토끼는 여럿이 무리 지어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방사된 집토끼로 보인다. 회귀하는 습성이 있어 다니는 길이 거의 일정한 데 햇볕이 따뜻한 날엔 팔각정 주변에 나와 사람 구경하는 일을 취미로 한다.

사라봉에는 들개도 많고 대형 육식성 조류 등 주위에 강한 적들이 상당하다. 그 위험천만한 환경을 토끼들은 잘 극복해 산다.

▲달과 토끼 이야기는 불교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은 물론 인도에서도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설화가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구 반대편인 중미 아즈텍 문명에도 비슷한 달과 토끼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토끼 이야기는 인류 공통인가.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직전, 미국 휴스턴 기지의 지휘부는 달 착륙 우주인들에게 “4000년 간 달에서 살았다는 토끼가 있는지 잘 살펴보라”고 우스개도 했다. 아폴로 11호 이후 반세기가 넘었지만 하얀 쪽배를 탄 토끼 한 마리는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다.

어느 덧 ‘세밑’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누구나 감회가 남다른 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리라. 하지만 늘 그러하듯, 또다시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회한의 마음부터 앞서는 게 현실이다.

▲지난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각박하고 힘든 한 해를 보냈다.

거기다가 ‘토끼 해’ 새해도 나라 안팎의 경제 사정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대세다.

이런저런 걱정에 새해 우리의 처지를 가련한 토끼에 비유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 “토끼 덫에 여우가 걸린다”는 말이 있듯, 토끼는 가련하지 않다.

흔히 교활하고 약은 동물이 여우라지만 토끼가 여우보다 한 수 위다.

토끼는 굴이 셋이라고 한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위기에 대비해 굴을 세 개나 운영한다는 것이다. 사라봉 토끼들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은 ‘굴이 세 개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토끼처럼 움치고 뛸 곳이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는 전혀 없다.

위기는 곧 기회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우리는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도 이를 잘 극복해낸 실력과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세밑 일주일, 마음을 다시 잡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인간은 슬픈 기억을 반추(反芻)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한 해의 마지막에 처음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지쳐 내려올 때에야 얻는 깨우침도 있으니 그리 실망할 일 아니다.

저마다 잘난 체 살아가지만 사람은 관뚜껑을 닫아봐야 안다.

슬픈 기억일랑 뭍어버리자.

새해 첫날 아침. 사라봉에 올라서 토끼들이 사람 구경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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