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무용기반 닦고 후학 양성 반세기...재단 설립도 구상
제주 무용기반 닦고 후학 양성 반세기...재단 설립도 구상
  • 김현종 기자
  • 승인 2022.11.14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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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8. '제주무용의 대부' 이창훈씨
1984년 첫 전국체전 식전행사 매스게임서 '해녀춤'..."전두환 대통령 '이창훈 선생 수고했어"
한국무용협회 제주도지회 결성-초대 회장 역임 비롯해 제주무용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해 와
부인부터 자녀 4명도 모두 무용인...교사 퇴임 기념공연서 제자들 "당신은 부모와 같은 스승"
청소년-무용인 성장 연결고리 강화 도전 아직 남아..."과거 바꿀 수 없지만 미래 바꿀 수 있어"
이창훈 황무봉춤보존회 회장이 최근 제자가 운영하는 무용학원에서 춤을 추는 모습. <이창훈 회장 제공>

지금부터 38년 전 제주에서 처음으로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전국체전 식전행사 매스게임이 진행된 제주종합경기장.

중학생 1600여 명이 참가해 제주해녀의 물질을 형상화한 몸짓을 선보였다.

오라벌에 파도가 일렁이고 해녀의 숨비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당시 매스게임 안무 총감독은 이창훈 현 황무봉춤보존회 회장(75).

이 회장은 제주무용의 토대를 닦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일생을 바친 무용계의 대부.

제주 첫 남성 전공자 무용과의 동행반세기

이 회장은 서귀포시 안덕면 출신으로 대정고를 나와 한양대 체육대학 무용학과에 들어가 1972년 졸업했고, 1991년 제주대학교 체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밟았다.

제주 출신 첫 남성 무용 전공자로서 지금까지 50여 년간 몸짓 예술과 동행했다.

그가 무용에 입문한 과정은 학창시절 이웃에 살던 김준씨(82)와 인연이 결정적이었다. 김준씨는 재즈 1세대 원로이자 작곡가로 빨간 마후라를 노래한 쟈니 브라더스의 멤버다.

이 회장은 고교 시절 사계리 부모님 집 옆에 살던 김준 선생을 알고 지냈다. 원래 무용을 몰랐는데 서울에서 김 선생을 만났을 때 무용을 해 보라고 권유하며 황무봉 학원으로 데려갔다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 무용을 배웠다고 돌아봤다.

이 회장은 제주 국공립 중고교에서 36년간 체육교사로 봉직했다.

최근 이창훈 회장이 제자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창훈 회장 제공>

19845월 제주에서 사상 첫 전국체육대회가 열릴 때 제주중앙여고에 근무하던 이 회장은 식전행사 매스게임 안무 총감독을 맡았다. 제주다운 것을 고민하던 그의 선택은 해녀였다.

제주시내 중학교 1학년 학생 1600여 명을 모았어요. 1983년 겨울방학 때부터 연습했죠. 학생 행렬이 입장하며 천을 길게 펼쳐 파도를 만들고, 가마전 자세를 이용해 해녀들이 배를 타고 노 저으며 물질 나가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테왁도 특수 플라스틱으로 제작해 안에 구슬을 넣어 소리가 나도록 했고 다양한 색상의 망사를 순식간에 씌우는 방법으로 색깔도 다채하게 연출했습니다. 실제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직접 녹음하려고 시도했지만 당시 열악한 녹음환경과 장비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제가 직접 휘파람소리를 연습해 녹음했답니다.(웃음)”

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회장은 전국체전은 엄청 큰 행사였다. 전두환 대통령과 문체부 및 중앙부처 인사들이 대거 내려와 관람했고 지역 특색을 매스게임화한 점을 극찬했다도청 식사자리에 초청 받았고 얼마 후 청와대에 다녀왔다. 전 대통령이 이창훈 선생 수고했어라고 했다고 전했다.

급기야 청와대로부터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 매스게임 연출 요청까지 받았다.

고민이 많았죠. 아이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생각에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대신 이 회장은 19888월 올림픽 성화가 그리스에서 채화된 후 국내 봉송을 위한 첫 기착지인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공연을 기획연출했다.

1998년 제주에서 다시 열린 전국체전에서도 그는 매스게임 총감독을 맡았다.

해녀 춤은 200310월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민족평화축전에서 다시 빛을 발했다.

이 회장은 북한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간 경기가 열릴 당시 식전행사 매스게임이었다. 학생을 투입해야 하는데 학교마다 모두 안 된다고 했다. 서귀포여고 교장과 교감, 학부모를 만나 보름 동안 하루 1시간씩만 시간을 달라고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고 체계적으로 연습했다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긍지를 느꼈고 소속감도 높아졌다고 했다. 나중에 삼성여고 측에서 왜 자신들은 매스게임에 안 끼워줬냐는 항의 아닌 항의도 받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5월 김만덕재단이 제주출신 국민 배우 고두심을 초청해 마련한 '고두심 연기생활 50년, 추억의 시간' 행사에서 이창훈 회장이 고두심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고두심은 이 회장의 부인이자 무용인이었던 고(故) 강금숙씨와 제주여고 동창이다.  <이창훈 회장 제공>

무용 토대 구축후학 양성 투신...‘무용인 가족눈길

그의 인생은 제주무용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 회장은 1987년 학교무용협의회 발족 및 회장 역임을 시작으로 1989년 한국무용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를 결성해 초대 지회장을 맡는가 하면 1991년 전국무용평론가 세미나 개최, 1992년 홍콩예술제 참가, 2003년 전국청소년체육대회 매스게임 안무 지도, 2004년 제주무용인 연수, 2005년 전국무용제 성공을 위한 제1회 전국콩쿠르대회 개최 등을 주도했다.

각종 공연은 물론 전국청소년해변무용축제 및 제주창작무용제 지속 개최를 비롯해 탐라문화제, 한여름밤의 해변축제, 도민체육대회 등에 무용의 멋과 향기를 입힌 것도 그의 몫이었다.

이 회장은 2019년부터 황무봉춤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그 해 한국무용협회는 황무봉 선생(1930~1995)의 산조를 명작무로 인증했다.

이 회장의 무용을 향한 열정은 가족으로 확장했다. 부인인 고() 강금숙씨(세종대 무용 전공)를 비롯해 장남 종익씨(한양대 한국무용 전공)와 차남 원익씨(세종대 발레 전공), 장녀 지연씨(한양대 발레 전공), 차녀 지은씨(한양대 현대무용 전공) 등 자녀까지 모두 무용인이다.

1998년 제주 전국체전 행사 당시 온 가족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 회장은 총지휘자로서 개막식 식전식후행사를 연출했고, 부인 강씨는 출연자들의 연기 지도를 맡았다. 종익씨와 지연씨, 지은씨는 해녀들의 안전을 비는 무속인으로 등장했다.

다만 당시 고3이던 막내 원익씨는 발레콩쿠르와 겹쳐 불참했다.

이창훈 회장이 한양대 2학년 재학 시절 부산 왕자극장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  <이창훈 회장 제공>

20099월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인연-이창훈 선생 퇴임 공연이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이 회장의 제자들이 스승의 불꽃같은 예술인생을 조명했다.

선생님이 실린 자료는 여간해서 찾을 수 없습니다. 늘 가족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계신 아버지를 닮았다고 할까요. 당신은 부모와 같은 스승이십니다. 제자를 위해 그림자가 돼 주셨던 선생님, 이제 양지에서 선생님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다짐이다.

이 회장은 가칭 이창훈 무용문화예술재단 설립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제주무용은 청소년기에 시작해 무용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연결하는 고리가 약하다. 제주무용의 기반과 발판을 보다 튼실하게 다지는 한편 생활무용인들이 설 자리를 넓히고 기초를 다져주는 역할이 중요하다. 3~4년 내 재단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이 회장의 인생철학이 반영된 문구다.

무용뿐만 아니라 인생 모든 분야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의지와 열정이 중요합니다. 어제에 집착하지 말고 내일의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뛰고 또 달려야 합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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