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겨울’을 나는 법
‘인플레이션 겨울’을 나는 법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22.11.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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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때 이야기다. 당시엔 교수나 학생이나 모두 학점에 대범했다.

전공 공부를 제쳐두고 이상한(?) 잡기에 탐닉하다가 학사경고를 받았다는 무용담이 횡행할 때였다. 평균 학점 3.0 아래만 가입자격을 주는 동아리까지 있었다.

그러다가도 C D F가 어지럽게 적힌 ‘찬란한’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속이 상해 막걸릿집으로 몰려가 학생증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댔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같은 과(科) 동기 두 명이 같은 곳에 취업 시험을 보러 갔다.

면접관이 그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적이 매우 좋군요”

다른 한 사람에게도 말했다. “성적이 매우 찬란하군요”

그런데 최종 합격자를 보니 성적이 매우 좋은 친구는 떨어지고, 성적이 매우 찬란했던 친구가 붙었다.

이상할 것도 없다. 면접관은 성적표보다 다른 면(스펙)을 보았으니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게 아니었다.

C D F 성적표를 받는 날은 학교 앞 술집은 으레 만원이었다.

밤새워 깡술을 통음(痛飮) 했다.

그런 밤에 목 놓아 부르던 시(詩)가 있었는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패러디한 ‘학점 헤는 밤’이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성적표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성적표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별들이 너무도 다양한 까닭이요, 플러스 마이너스가 너무도 복잡한 까닭이요, 헤아려봐야 장학금 신청기준도 못 되는 까닭입니다/…A 하나에 추억과/ B 하나에 사랑과/ C 하나에 쓸쓸함과/ D 하나에 동경과/ F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순전히 웃자고 만들어 부른 패러디지만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뼈가 있다.

▲대학은 졸업반 학생들의 교과과정이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취업 문제로 분위기가 어느 해보다 더 어둡다고 한다.

진로가 불투명하니 일부러 전공 필수에서 F학점을 받고 졸업을 미루고 한 학기 또는 1년 더 다니겠다는 ‘대학 5학년 예비생’도 늘고 있다고 한다. 또 학생들의 취업을 돕고자 졸업반 학생들에게 무더기로 A학점을 주는 ‘성적표 세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너도나도 좋은 점수를 받다 보니 학점 불신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이 학점을 가장 변별력 없는 ‘취업 스펙’으로 꼽았다는 조사만 봐도 그렇다.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을 앓고있는 데, 대학도 학점 인플레이션이 벌어져 오히려 실력 있는 학생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입동(立冬, 7일)이 지났다.

어디 대학 졸업반뿐이랴.

개인과 기업, 나라 가릴 것 없이 스산하기 짝이 없다. 계절이야 몇 달 있으면 지나갈 테지만 이 ‘인플레이션 겨울’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마당이다.

길고 긴 겨울을 나자면 동물은 겨울잠을 자거나, 멀리 이동하거나, 번데기가 되거나, 털갈이를 한다.

사람도 겨울을 헤쳐가자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또 한 가지. 겨울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짐을 최소화하고 조심스럽게 계속 움직여야 한다. 욕심 때문에 짐을 못 버리고 주춤거리면 얼어죽기 십상이다. 잎을 떨군 채 겨울을 난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듯 사람도 겨울을 견디면 내공을 얻는다.

제 아무리 혹독한 겨울도 언젠간 끝날 것이다.

고물가 고금리 엄동(嚴冬)에 떨고만 있을 게 아니라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배짱과 용기, 그 어떤 일에도 지치거나 무너지지 않는 끈기와 뚝심으로 버텨 볼 일이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이고 오늘(present)은 곧 선물(present)이라는 말도 새겨보면서.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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