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이 주는 잠언
이 가을이 주는 잠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10.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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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다층 편집인

조용하다, 너무도 조용하다. 정원이, 정원의 나무가, 정원의 나뭇잎과 정원의 풀잎이, 죽은 듯 꿈을 꾸는 정원, 영혼 가득한 숲 속, 정원의 모든 것이 온화하다.

천사가 드려놓은 정원의 악보가, 악보의 리듬이, 리듬 속에 감춰진 천사의 음성이, 화평이, 화평보다 더한 사랑의 노래가 끔찍이 고요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고요는 더 깊은 공유적 삶이 명징함으로 어쩌면 엄숙한 질서와도 같다. 나는 이 엄숙한 고요 속의 명징함을 이곳 메릴랜드의 조용한 전원(田園)을 통해서 갈무리해 본다.

가을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 가을비와 가을 안개의 공간 속에서 소복소복 쌓이는 낙엽의 우수는 사랑이라는 꿈을 꾸고 이별이라는 노래로 묵상한다. 주변의 모든 사물은 그러므로 가을 속으로 숨어들고 가을 속으로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는 의미는 간절함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가을을 기도의 계절이라고도 부른다. 엄숙함으로 충만한 이곳 가을 숲 정원을 보면 안다.

눈을 감아도 뜻으로 열리는 창, 가을을 닮고 싶은 천사들의 음성, 간절함이 짙은 기도, “제 눈빛을 꺼주소서/그러나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라는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시구(詩句) 역시 닫혀 있는 마음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열고자 하는 참사랑 의미의 기도다. 가을 앞에선 진실 된 신심이다.

지난 여름 그 많던 이름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우리들 곁을 떠난 것 같지만 가을이란 이름 앞에서는 누구나 참회의 눈을 뜬다. 참회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가을은 내게도 조용히 다가와 파도소리, 뱃고동소리를 뒤로한 체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이곳까지 왔다. 내 안의 나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낳고 키워주신 은혜’를 갚는다는 자식들에 의해 우리 부부는 예상치 못했던 여행을 참회의 시간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계절에 이끌려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에선 가을 낙엽이 심심치 않게 발에 밟힌다. 이브 몽탕(Yves Montand)의 ‘고엽(枯葉)’이면 족할 사랑과 이별과 엄숙한 기도가 이곳으로 펼쳐지고 있어서다.

그는 노래를 시(詩)처럼 읊고 노래처럼 시를 연주한다. 이브 몽탕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의 음성이다. 시의 바이브레이션이 여기 있다.

“오! 나는 그대가 기억해 주길 간절히 원해요/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행복했던 나날들도/그땐, 인생은 더없이 아름다웠어요/그리고 그 태양은 오늘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죠/낙엽들이 무수히/많이 쌓여 있어요//추억도 미련도 함께 말이죠/….”

뒤이어 들려오는 냇 킹 콜의 사랑이야기도, 에디트 피아프의 슬픈 사랑의 이별도, 이별을 사랑이라 노래 부르는 가난한 연인들의 샹송도, 낙엽 지는 이곳에선 모두가 다가가서 껴안고 싶은 것들뿐이다. 이럴 때 배호의 고엽은 더더욱 감미로운 멜로디로 젖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가을비는 그래서 슬프도록 아름답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의 여행은 사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메릴랜드를 거쳐 아나폴리스의 바다 향기와 볼티모어의 사람 냄새를 맡는 것도 좋다. 아니면 뉴욕 혹은 뉴-저지에서 아메리카 드림을 맛봐도 좋다. 그도 아니면 보스턴의 촬스 강이든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비치와 동남부까지 이어진 광활한 대륙의 여유로움에 내 좁은 양심의 부끄러움도 비춰본다.

마이애미를 거쳐 남쪽 끝 아직도 헤밍웨이의 숨결이 남아있는 키웨스트와 서든모스트 포인드(Southernmost point)에서 우리들의 삶의 뉘우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다가 선셋 세일링에서 패배를 모르는 인간의 참모습을 마주해보는 모험도 담아본다.

그렇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 땅, 나의 향수는 이곳이 아닌 내가 떠나온 제주의 가을에 있다. 잠시나마 꿈속같이 행복했던 가을여행은 그러므로 여기에서 마감해야 한다.

우리들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 아름다운 내 고향 성산포 아침 태양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서다. 일출봉 해안 모래밭으로 성가시도록 부서지는 파도의 사연을 서럽도록 들어줘야 한다. 성산항에 묶여있는 어선들의 간절한 몸부림도 다독여줘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념과 가치 상실이라는 삶의 모순 속에서 진실을 외면한 채 시기와 질투와 모함 등의 이전투구로 국가 안위마저 흔들리는 내 조국 내 형제들이 불안한 삶을 위해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기도해야 하므로.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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