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몽생이 기질 제주촌놈, 미국에 '한국의 얼' 전파
"태권!"...몽생이 기질 제주촌놈, 미국에 '한국의 얼' 전파
  • 김현종 기자
  • 승인 2022.09.19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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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시카고서 월드챔피언태권도장 운영 김태형씨
7살 때 태권도 입문...중학시절 소년체전 노메달 설움 극복 승승장구
고2 때 대통령기 우승, 한국체대 특기자 스카우트 제의 받은 후 입학
상무 거쳐 최강 실업팀 입단 계약했지만 고향 부름에 남녕고 교사로
새로운 도전으로 필리핀 국대 감독 맡아 세계 메이저대회 모두 경험
'최강대국 무대 개척' 2005년에 미국행, LA 거쳐 시카고서 도장 운영
"외롭고 힘들 때마다 강해졌다...제주인 특유 강인한 정신력이 원동력"

제주 태권소년이 성장해 서울과 필리핀을 거쳐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다.

시카고에서 16년째 도장을 운영하며 미국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김태형 관장(53).

최근 이메일과 SNS, 통화를 통해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한 김 관장은 외로울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제주인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이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월드챔피언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김태형 관장.

패배는 있되 절망은 없다메달 못 딴 게 약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출신인 김 관장은 7세 때 태권도에 입문했다.

집 근처 태권도장 관원들의 겨루기 모습에 매료된 그는 부모를 조른 끝에 입관했다.

김 관장은 대정읍 체육대회에 나갔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점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대정초 재학 당시 태권도 선수로 뽑힌 김 관장은 전국대회에 출전해 3위에 입상했다.

김 관장은 대정중에 입학했다가 가족이 제주시로 이사하면서 오현중으로 전학했다.

오현중에 태권도부가 없었는데 체육교사가 태권도 했던 학생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몇 명이 손을 들었죠. 반에서 껄렁껄렁한 애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저와 그 애를 겨루기 시켰죠. 걔는 보기보다 세지 않았어요.(웃음) 선생님이 제주시체전 선발전에 나가 보라고 했어요.”

김 관장은 제주시체전을 거쳐 전도체전에 나가 차례로 우승해 제주도 대표로 선발됐다.

그는 “1984년 제주에서 처음 열린 전국소년체전에 8체급별로 1명씩 제주대표가 선발됐다. 선수들은 종합 우승을 목표로 7개월간 합숙훈련에 매진했다그해 소년체전 직전에 열린 전국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던 터라 메달 획득 가능성이 높았고 주변 기대도 컸다고 했다.

하지만 김 관장은 메달권 밖으로 밀려났다. 8명 중 메달을 못 딴 2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메달을 딴 선수와 따지 못한 선수에 대한 대우가 확연히 달랐다. 어린 나이에 충격이었다그땐 서러웠지만 결과적으로 메달을 못 딴 게 약이 됐다고 돌아봤다.

오현고로 진학한 그는 이를 악물었다. 1학년 때 전국체전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면서 1년 전 소년체전 노메달의 설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2학년 때 대통령기대회에서 우승하자 한국체대 특기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2에게 스카우트 제의는 흔치 않았죠. 고교 때 물이 올랐습니다. 전국대회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어요. 딱 하나 전국체전에서만 우승을 못했죠.”

김 관장을 두고 2의 장승화가 등장했다는 말이 회자됐다. 장승화는 오현고와 한국체대를 졸업했고 1982년 제5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 헤비급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훤칠한 외모로 1985년 영화 애마부인 3’로 데뷔한 후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월드챔피언태권도장에서 꼬마 관원들을 지도하고 있는 김태형 관장.

힘들 때면 더 강해져제주인 DNA가 원동력

꿈에 그리던 한국체대에 들어갔지만 낯선 땅에서 혼자 살아가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여 경쟁하는 틈바구니에서 잔뜩 주눅도 들었다.

김 관장은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친구선후배도 없는 곳에서 너무 외로웠다면서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텼고 2학년이 되면서 적응이 됐다. 성적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국가대표 선발전과 대학연맹전 등에서 메달을 땄고 전국 1등도 차지했다.

대학 졸업 후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한 김 관장은 그 동안 유일하게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전국체전에서 우승하는 기쁨을 맛봤다. “지금도 그때 감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1994년 상무에서 전역할 즈음 한국 실업팀 최강이던 춘천시청과 입단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김 관장이 행로를 급선회했다. 제주도태권도협회로부터 남녕고 체육교사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한국 최강 실업팀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고향이란 존재의 부름을 외면할 순 없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후진 양성을 위해 귀향했고 남녕고 교사로 근무했다.

1996년 김 관장은 남녕고 태권도 단일팀을 이끌고 사상 최초로 유럽에서 1개월 간 순회경기를 추진했다. 김 관장이 선수로 뛸 때 맺어둔 유럽 선수들과 인연이 빛을 발했다.

이듬해 김 관장은 선수들을 데리고 멕시코 오픈대회에도 참가했다.

1999년엔 태국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있던 후배의 초청으로 김 관장은 선수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건너가 2주간 현지 선수들과 합숙훈련을 진행했다. 김 관장은 학생들이 외국학생선수들과 시합하는 경험을 많이 쌓게 했다. 경기력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브랜드인 아디다스 태권도 모델로 활동할 당시 김태형 관장(오른쪽).

김 관장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브랜드인 아디다스 태권도 모델로도 활동했다.

남녕고 교사생활 7년이 흐를 즈음 필리핀에서 국가대표 감독 제안이 들어왔다. 주변에서 왜 좋은 교사 자리 사표 내나라며 말렸지만 김 관장은 새로운 도전을 향해 결단을 내렸다.

필리핀 태권도 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그는 2002년 아시안게임부터 아시아선수권, 월드컵태권도대회, 세계선수권, 2004년 올림픽까지 세계 메이저시합을 모두 뛰는 경험을 축적했다.

김 관장에게 또 다른 개척정신이 꿈틀거렸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 무대를 밟는 것으로, 이미 태권도 선후배도 많이 진출해 있던 터였다. 두 아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도 곁들여졌다.

마침내 그는 2005LA로 떠났다. 1년 뒤 김 관장은 시카고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후배에게서 텍사스로 이사할 예정이라 자신의 도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승낙했다.

그는 한때 도장을 3곳까지 확장했다가 2곳은 접고 현재 월드챔피언태권도장 1곳에 집중하고 있다. 관원은 500여 명 규모다. 김 관장은 맥도날드 부사장도 도장에 다닌다고 전했다.

김 관장은 태권도는 내 인생의 전부다. 하얀 태권도복을 입은 백인을 가르치면서 항상 뿌듯하다. 제가 가진 재능을 환원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미국인은 나이가 들어도 하얀 띠를 매고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게는 제주인의 피가 흐른다. “제주촌놈이 서울, 필리핀을 돌아 미국까지 왔어요. 힘들고 지칠 때마다 포기하지 않았고 더 강해졌습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척박한 환경을 일궈온 제주인은 정신력이 강할 수밖에 없죠. 그런 DNA를 받은 만큼 요망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태형 관장은 "제주인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이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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