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목소리”
“기억의 목소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8.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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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시인

지난 8월 9일은 102살의 나이로 운명하신 그의 모친의 여덟 번째 기일이었다. 제사상 건너 구석진 곳에는 꽤나 연륜 있고 낯익은 고품(古品) 한 점이 사진과 함께 있다. 또 그 곁 벽면에는 그 사진과 관련된 한 편의 시(詩)도 액자로 걸려있다. 일본식 ‘발미싱’(treadle sewing machine)과 발미싱의 ‘사진’과 ‘미싱’이라는 제목의 시(詩)다.

‘발미싱’은 일제 강점기 때 그의 부모께서 일본 오사카에서 쓰시던 유품이다. 일본 패망을 예감한 그의 부모가 유일하게 들고 오신 재산목록 1호다. 덕분에 일제 패망과 ‘제주4·3’, 그리고 ‘6·25’의 와중에서도 이 ‘미싱’은 그의 가족을 죽음에서 건져 준 은혜의 산물이기도 했다.

‘제주4·3’의 대학살은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아버지 삼형제는 물론 아버지 4촌 등  온 집안이 몰살당하는 참변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의 모친은 일본에서 어렵게 들고 온 ‘미싱’으로 가난한 이웃과 피난 온 분들의 헌 옷, 헌 이불 등을 기워주고 새것으로 만들어 주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심으로 이웃들에게는 ‘은혜로운 그녀’로 통했다.

밤을 새워가며 미싱질을 하시느라고 두 다리가 퉁퉁 붓는 노역의 병까지 얻기도 하였다. 그처럼 주변 분들을 위해 베푸신 헌신적인 노력과 은혜는 당시 서슬 퍼런 경찰과 서북청년까지도 감동시켜 그녀와 자식들의 목숨만은 건져냄으로써 그나마 온 가족의 폭살은 면할 수 있게 했다. 

제주사람들 모두에게는 이 같은 ‘제주4·3’의 기억과 흔적이 많다. 그 흔적들은 2021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기억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다. 시인 허은실과 사진작가 고현주가 공동으로 집필한 ‘사물에 스민 제주4·3이야기’다. 유족들이 간직하고 있는 4·3 관련 갖가지 유품과 수장고에 보관된 신원불명 희생자의 유품 등이 그것이다.

그들이 생전에 했던 일, 살아서 맺었던 애틋한 관계, 일상에서 사용했던 지극히 평범했던 사물(事物)들이었기에 이 평범함은 더 큰 슬픔으로 증폭되어 가슴쓰린 이야기로 안겨온다.

이날 유품으로 놓여 진 제사상 곁의 ‘미싱’과 ‘사진’, 그리고 ‘시’(詩) 역시 70여 년 전 당시 제주 곳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현장을 말없이 지켜봤던 ‘기억의 목소리’의 사물들과 함께 실린 기록물이다.

유품사진기록작업을 마친 사진작가 고현주님은 프롤로그에서 ‘세월의 흔적을 혼자 더께로 입고 남겨진 사물들은 4·3의 참혹한 현장 그 자체’라고 했다. 그만큼 기억은 숨겨져 있던 것들의 나타남이며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존재함인 것이다.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허은실 시인이 시(詩) ‘미싱’이 주는 아우라는 사물과 인간이 맺는 소박하고 내밀한 관계를 엿보게 할뿐더러 ‘제주4·3’이라는 아픈 역사와 맞물려 그 울림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젊은 엄마의 두 손 사이/수천수만 번 바늘이 지나간다/튿어진 솔기/찢긴 세월을 깁는다/조각난 생을 잇는다//밤새 미싱 돌아가는 소리에/아들은 키가 자랐다//바늘 한 걸음에 한 땀/찔려 뒷면을 통과한 자리라야/땀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허은실의 ‘미싱’ 중에서) 

‘미싱’ 그 자체만을 본다면 옷감이나 비닐 가죽 등을 박아 여러 가지 의류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내는 바느질 기계일 뿐이다. 그렇지만 내부적 구조는 ‘실패에 감긴 윗실’과 ‘북통에 감긴 밑실’ 두 가닥이 천을 잇고 꿰매고 수를 놓는 내밀하고 정밀한 우리 생활 속 삶의 양태다. 어쩌면 우리들 기억 저편에 있는 ‘과거의 밑실’과 ‘현재의 윗실’을 이어놓는 아우라일 수도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찾는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제주4·3’이라는 ‘기억의 목소리’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은 사물의 영혼들, 그 부재 속의 존재들을 기억하며 칠십여 년 전 제주인의 아픔을 ‘기억의 목소리’로 호명해 본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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