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극복 공동체 복원...4.3은 참혹했지만 위대한 역사"
"아픔 극복 공동체 복원...4.3은 참혹했지만 위대한 역사"
  • 김현종 기자
  • 승인 2022.08.10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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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종민 4‧3중앙위원회 위원
신문기자로 1988년부터 2000년까지 4.3 취재 지면 연재 '4.3은 말한다' 집필 참여
7000명 넘는 희생자.유족 만나 "맨땅에 헤딩"...수십만 km 이동 새차 10년 만 폐차
2000년부터 2013년까지 4.3중앙위 전문위원 맡아 '진상조사보고서' 편찬 등 참여
극우세력 소송 때 수임자 등으로 대응 최전선...최근 재심 사상검증 논란 증인으로
김명수 대법원장께 쓰는 편지 통해 보상.가족관계 정정 등 호소...차례로 현실화돼
4.3 남은 과제 교육, 후세 전승, 연구 강화, 정명 꼽아..."항쟁에 담기엔 4.3 너무 커"

제주인이 있다.

그들은 공동체를 유지하며 자연을 개척해온 공존과 도전정신이 돋보인다.

공존의 가치를 실천하는 지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이 그들의 DNA에 녹아 있다.

제주는 물론 세계를 무대로 우뚝 선 그들의 인생은 대전환의 시대 나침반이 될 것이다.

본지가 그들의 삶과 철학을 들여다보는 제주 & 제주인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최근 제주문학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종민 4‧3중앙위원회 위원.    <임창덕 기자>

 

지난 743희생자 특별재심과 관련 검찰의 사상검증 논란이 일었다.

검찰은 재심 신청 43희생자 중 4명의 무장대 활동 경력을 의심했다.

재판부(장찬수 부장판사)는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직권으로 증인을 채택했다. 증인은 김종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43중앙위원회) 위원(61)이었다.

재심 두 번째 심문기일 증인석에 앉은 김종민 위원은 희생자가 간첩으로 남파됐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해당 인물은 형무소에서 풀려나 조용히 제주에서 지내다 생사를 달리했다. 간첩이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았어야 한다. 그런데 처벌 기록이 없다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김 위원은 재심 증언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43중앙위는 미군보고서와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토대로 무장대 수괴급으로 파악된 32명을 희생자에서 제외시켰다지금 간첩사건에 대해 재심하는 게 아니지 않나. 43 당시 엉터리 군법회의(군사재판)에 대한 것이다. 재심에서 간첩 운운하는 건 언급 자체가 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43 전문가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날카롭고 통쾌한 발언이란 평가가 도민사회에서 이어졌다.

김 위원은 기자 출신으로 30여 년간 43 진실 규명에 천착해왔다.

서귀포시 신효동 출신인 김 위원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1987년 제주신문에 입사해 이듬해 3월 꾸려진 43취재반에 합류했다. 43과 지독한 인연을 맺은 순간이었다. 김 위원은 2년 뒤 43취재반과 함께 제민일보로 옮겨 2000년까지 취재를 지속했다. 김 위원은 7000명이 훌쩍 넘는 희생자유족의 증언을 채록해 지면에 연재한 후 ‘43은 말한다집필에 참여했다.

김 위원은 43 취재반과 관련 “43 유족도 아니고 갓 입사해 검증도 안 된 기자였다. 43 취재 과정에서 사료가 중요하기 때문에 역사를 전공한 나를 선배들이 뽑았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운명이었다당시 43이 금기시 될 때였다. 제주대 학생들이 43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언론사를 비판했다. 취재가 시작된 후 도의회 43특위가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43 취재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43 증언을 듣는 것은 마을별로 한 두 사람을 만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무턱대고 찾아간 후 묻고 또 물어 취재 대상자를 찾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과정이었죠. 취재를 위해 기동력이 필요하다 보니 1989년에 중고차를 샀지만 1년 만에 퍼졌고 1990년 당시 엑셀 최고 사양으로 새 차를 뽑았는데 10년도 안 돼 폐차장으로 갔죠.(웃음)”

43 취재 당시 차를 타고 이동한 거리만 수십 만 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3 보도가 시작된 후 도민들의 반응에 가속이 붙었다.

김 위원은 신문에 43 증언이 보도된 유족들이 점심시간 전쯤 전화가 오곤 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얘기를 잘 전달해 줘서 고맙다고들 했다유족들이 가슴에 담아뒀던 얘기를 꺼내면서 스스로 위안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경찰이 신문 보도내용을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가령 유족 할머니가 동생의 희생을 얘기한 부분을 호적과 비교하며 사실과 다른 점을 따져 묻는 식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김 위원은 즉각 경찰을 비판하는 기사로 응수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초반에는 취재를 달가워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분도 많았습니다. 대략 절반쯤은 다른 사람에게 알아보라며 협조하지 않았죠. 한번은 40대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왜 쓸데없이 어머니를 만났느냐고 따졌습니다. 형과 동생, 아버지가 죽은 얘기를 꺼내고 나서 어머니가 잠도 못 잔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43 보도가 도민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호응이 잇따랐다.

김 위원은 “43 기사를 접한 일부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마을 피해가 더 큰 데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어떤 분은 취재를 마치며 나오는데 아들이 모 신문사 기자인데도 말하지 못했던 내용을 꺼내고 나니 후련하다고도 했다고 돌아봤다.

43 취재는 제주시에서 동쪽 마을부터 시계방향으로 차례로 돌며 진행됐다.

최근 제주문학관 야외 정원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종민 4‧3중앙위원회 위원.  <임창덕 기자>

 

김 위원은 43특별법이 제정공포된 2000년부터 2013년까지 43중앙위 전문위원을 맡아 실무를 총괄하며 제주43사건 자료집’ 11편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편찬에 참여했다.

그때까지 43을 빨갱이, 폭동과 연결 짓는 시선이 엄존했으니 시련과 고난이 왜 없었을까.

20093월 이후 보수단체극우세력들이 제기한 헌법소원 2건과 행정소송 2, 국가소송 2건 등 소송전으로 색깔론 공세를 펴는 과정에서 김 위원은 수임자를 맡는 등 법적 대응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씨 등이 43특별법에 규정된 수형자 등에 대한 희생자 결정이 자유 민주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며 제기한 헌법소원 등이 대표적이다.

사법부는 최종적으로 6건 소송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김 위원은 잇단 소송전은 이명박 정권 당시 보수 극우세력들의 인해전술의 산물이었다. 소송 내용이 토씨 몇 개 빼고 사실상 똑같았다소송에 지고난 후 그들은 작전을 바꿔 43희생자 중 남로당 간부가 포함돼 있다는 등 이념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은 2013643중앙위 전문위원에서 해임됐다.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득세하면서 43특별법을 폐지하고 43위원회를 없애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던 때였다.

이후 김 위원은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강연 등을 통해 43의 진실을 알려왔다.

그러다 지난해 7월 김 위원은 43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43특별법 개정으로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게 되면서 보상심의분과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김 위원은 올해 4김명수 대법원장께 쓰는 편지를 언론에 투고했다.

43 당시 뒤틀린 호적으로 인해 유족들이 지금도 가족관계를 바로잡지 못해 눈물 흘리고 있는 만큼 정정이 수월하도록 대법원 규칙을 개정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김 위원은 김 대법원장에게서 전화를 받았고 대법원 규칙은 개정됐다. 앞으로 시행령이 개정되고 매뉴얼이 마련되면 43위원회 의결로 가족관계 작성정정이 가능해진다.

앞서 김 위원은 20181월에도 언론을 통해 김 대법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43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필요성을 제기한 글로, 그해 43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김 위원의 글을 그대로 추도사로 옮겼다. 결국 희생자 보상은 현실이 돼 올해부터 진행되고 있다.

43 해결을 위한 남은 과제로 김 위원은 43 교육과 후세 전승, 연구, 정명 등을 꼽았다.

김 위원은 특히 43 연구 및 정명과 관련 광주 518연구소는 물론 여순 반란사건 관련 순천대 1019연구소도 있는데 제주대 등에는 43 관련 연구소가 없다항쟁이란 용어에는 반대한다. 물론 항쟁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용어 안에 담기에는 43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43은 과연 뭘까. 김 위원은 참혹했으나 위대한 역사로 규정했다.

현재 7080대 후반 유족들이 43 당시 꼬마부터 10대였습니다. 부모를 잃고 집도 불탔습니다. 남의 집 머슴이나 애기업개로 들어가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그렇게 버티고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지금은 손자손녀를 보고 있습니다. 소년소녀들이 비극과 아픔을 극복하며 마을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복원해 놓은 겁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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