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의 미학(美學)
검정의 미학(美學)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8.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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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섭 문화예술연구소 함덕32 대표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장면의 전환을 위해 일시적으로 조명이 꺼지는 상황을 ‘암전’(暗轉)이라고 한다.

불과 몇 초의 짧은 순간이지만, 이때 관객들은 다음 장면에 대한 기대와 집중, 그리고 상상의 기회를 체험하게 된다. 몰입과 집중의 경험을 통해 또 다른 세계가 어둠 속에서 준비되는 것이다.

어둠을 대표하는 색은 검정색이다. 물리학에서 검정은 스펙트럼, 즉 빛으로 투사되어 만들어진 색채의 개념으로 볼 때는 무채색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색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완벽히 빛을 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수많은 검정색을 접하게 된다.

역사, 문화적으로 검정색은 인간의 마음속에 다양한 이미지와 포괄적인 상징화를 통해 내면화되고 각인되어왔다. 예를 들어 검정색은 어둠을, 흰색은 밝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으로 인식되곤 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기인하여 이전부터 김정색이라고 하면 침묵이나 좌절, 공포, 죽음 같은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 올리게 했다. 사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원시 시대 인간에게 밤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검정색은 종종 두려움이나 악의 이미지로 간주되곤 한다. 

중국 한자성어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거기에 물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또 음흉한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한자로 흑심(黑心)이라는 단어도 있다. 과거, 흰색을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불멸의 색으로 여긴 유교적 인식 때문인지 검정색에 대한 시각은 때때로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영어에서도 검은색(Black)과 관련된 단어를 찾아볼 수가 있다. 가령 black mail(협박편지), black money(부정한 돈), black list(요주의 인물 목록) 등이 있다. 이처럼 검은색을 뭔가 부정적 이미지로 바라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정색에 대한 이미지가 항상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요즘은 고급스러움과 정결함, 그리고 세련미를 표현할 때 검정색이 많이 쓰이며 중후하고 강한 느낌을 강조할 때도 많이 쓰인다.

특히 빛을 흡수하는 검정색의 특성 때문에 넉넉함이나 포용 또는 태초의 신비나 창조 같은 원초적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처럼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검정색은 우리의 문화와 생활 속에서 다양한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구조화되고 내면화되었다.
제주도는 오랫동안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화산섬이다. 그래서 아직도 수많은 용암동굴과 오름 등이 남아 태고의 원초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용암의 분출과정에서 생성된 검은 현무암은 제주의 해안지대와 중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제주를 대표하는 자연문화유산인 돌담 역시 현무암을 쌓아 조성한 것이다. 

제주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제주만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푸른 바다라고 대답한다. 세계 어느 곳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비췻빛 바다가 섬 둘레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다 빛을 더욱 영롱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현무암이다. 검정색과 비취색이 어울리며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제주 음식문화에서 흑돼지는 빼놓을 수 없는 품목 중 하나이다. 그와 더불어 최근에는 검은 소(黑牛) 역시 제주의 토종 소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처럼 색채 이미지는 미적인 효과와 정보 전달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며 생활과 문화환경의 변화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넉넉함과 억척스러움, 그리고 평화와 신비의 상징으로서 제주 섬을 표현할 때 검정색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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