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학
죽음의 미학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7.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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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업 시인·공인중개사

누구나 인생 살아오다가 한번쯤은 주저앉아서 생각해 보는 문제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이다. 나이가 칠십을 훌쩍 넘어가다 보니, 주변에 삶을 마감하고 이별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접하게 됐다.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살았는지,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한가지 공통된 점은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사람은 끝없이 살아있어야만 할 존재로 착각하면서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 상금으로 빵을 몇 개 살 수 있을까요?”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 뒤에 만찬을 거부하고, 노벨 평화상 상금 19만2000달러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나환자 구호소 건설 기금으로 기부했다고 한다. 한 기자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에 “집에 돌아가셔서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극빈자들을 위해서 살아온 테레사 수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한평생을 몸 바쳐 신을 찾아 헤맸지만 그 어디에도 신은 볼 수 없었다”라고 한다. 평생을 나환자와 극빈자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신의 자비로움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교계의 거목 성철 스님은 임종시에 54년을 단절해 온 딸 필히를 찾아서 유언하기를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나는 지옥으로 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삶의 의미가 분명했던 것 같은 두 분 모두 생(生)의 마지막에 신의 세계를 갈망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인간이 신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신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정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얼마 전, 뉴스에서 들으니, 누군가의 애완견이 8세 소년을 공격하여 목숨을 위협받은 일이 있었다. 요즘은 사람이 개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문제는 신과 인간의 구분만큼이나 애매하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아 부으며, 비로소 살아야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나, 신의 존재를 의식화 하여 목숨을 바쳐 섬기는 모습들은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를 느낀다.

코로나19는 3년여 세월 동안 사람들과 친해져서 보다 친근한 변이를 일으키며 인류와 공존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미국 국립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 앤서니 파우치는 코로나19가 박멸되기 까지 앞으로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원숭이 두창이라는 이상한 질병이 인간의 세계로 들어와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조그만 바이러스 하나가 전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이 그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은 시간과 죽음이다. 질병은 죽음으로 가는 통로일 뿐이다.

톨스토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이 내 生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세상과 이별해야하는 죽음의 문제도 평범한 일상처럼 차근차근 준비해 두면 어떨까?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해답이 되지 않을까? 가난한 심령과 비움의 지혜를 터득하고 매일 매순간 기쁘고 즐겁게 보내라. 오늘 숨을 쉬는 것도 감사하라.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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