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거리
멀고 먼 거리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7.2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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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어둠은 빠르게 물러났다. 예불을 마치고 간단하게 공양하는 동안 희끄무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직 기지개를 켜지 않은 숲길을 밟으며 길을 나섰다. 전날 뒤처지면 일행들에게 폐가 될까 발걸음을 재촉했던 탓에 주위를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불자라면 살아생전 꼭 참배하고 싶어 한다는 불교 성지 봉정암. 설악산 높은 봉우리에 자리한 이곳을 다녀간 후로 10년 세월이 흘렀다. 간절하게 기도하면 소원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는 말에 이끌려 찾았던 곳이다. 10년 만에 봉정암 1박 2일 여정을 신청해 놓고는 체력단련에 힘썼다. 별도봉도 오르고 석굴암도 찾으며 노력했건만 어림도 없다.

오르고 올라 눈썹도 무겁다는 깔딱고개를 넘을 때는 등에 진 배낭도 부려 놓고 싶은 마음이다. 거친 호흡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마음을 다독여 가라앉히기 위해 그늘을 찾는다. 비에 젖은 나뭇잎에 미끄러질까 땅만 보며 걷다가 숨을 돌리며 앞을 보니 저만치에서 암자가 다가온다. 고난 끝에 끌어안는 환희의 순간이다.
우렁차게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물줄기 속에 떠오르는 시가 있다.

고독을 완성해가는 자의 변은 얼어있을 것이다.
수맥이 막히지 않고 엉덩이만한 얼음무덤에 물은 흘러나오고
성스러운 것은, 그 눈보라 속에서 서 있는 한 백골집
뿔 돋은 벼랑 끝 노송처럼 솔잎을 떨며 지키는 것 하나와
아이 같은 봉정암, 그 안 오롯하신 한 채의 몸
알 길 없는 창자 속에서 나온 변은 찬란한 얼음이 박혔다.
얼마나 먼 곳인가 그곳과 이곳, 서로 얼마나 먼 곳인가.
고형렬 시인의 - 설악산 끝 봉정암 -

칠순이 넘은 이들도 마음을 부여잡고 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마지막 힘을 내었더니 아이 같은 봉정암에서 오롯하신 한 채의 몸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느긋하게 걸으며 주변을 둘러 봤더니 올라갈 때 보지 못한 풍경들을 마주한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봉정암에서 맺은 인연들과 함께 너럭바위에 앉아 등산화도 벗고 양말도 벗는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차가움이 머리까지 짜릿해 온다. 그동안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면서 모든 감각에 오래 기억하고 싶은 추억 하나가 자리한다.
  
아직도 피어 있는 산 목련을 보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주변을 꽉 채운 나무들과 함께 자연의 고독하고 성스러운 수행을 가늠해본다. 이들은 얼마나 먼 거리, 얼마나 먼 시간을 흘러 여기에 있는 것일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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