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변 포로수용소를 두 번이나 탈출한 불사신 박정인 장군을 기리며
압록강변 포로수용소를 두 번이나 탈출한 불사신 박정인 장군을 기리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6.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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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윤 한국군사과학포럼 대표

호국보훈의 달이다.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한 국가보훈의 현주소를 되돌아볼 때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산화한 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군과 나라의 정기 바로 세우기에 대한 본질적 고민도 함께해야 한다. 보훈의 근본정신을 훼손하는 잘못된 법과 제도, 관행도 고쳐나가야 한다. 보편적 상식에 맞게 손 볼 여지가 있는 국립묘지 묘역, 국가유공자 대상, 병역의 공정성, 병역면탈 등을 말함이다.  

지난 6월 9일 윤석열 대통령이 천안함 유족과 제2연평해전 유족 등을 초청한 자리에서 “영웅이 대우받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강조한 것은 군 통수권자다운 모습이었다. 전장에서 산화한 군인, 전상자를 정성들여 예우하는 일은 나라사랑의 길이자 온 나라가 짊어질 최소한의 책무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드는 시발점이다. 

보훈의 달을 맞아 2016년 2월 3일 향년 88세로 별세한 박정인 장군을 기리고자 한다. 야전군인으로서 그가 남긴 파란만장한 삶은 군의 귀감이자 전설이다. 다음은 1950년 겨울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복귀한 소설가 박개주의 글과 박 장군의 아들 박홍건 대령(예)과의 대화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박정인은 1950년 10월 말 제6사단 19연대의 작전주임으로 북진작전에 임하던 중 평북 태평에서 포로로 잡혔다. 압록강변 벽동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그는 12월 말 수용소를 탈출한다. 그러나 구성과 태천 중간 지점에서 체포되어 벽동수용소로 재압송되었다.

1951년 1월 23일 재탈출을 감행한 그는 구장-양덕-원산-평강을 거쳐 당시 중공군 점령하의 서울 잠입에 성공한다. 당시 포로로 끌려갔던 19연대 정보주임 김원군 대위와 함께 원리수용소에서 탈출해 영변 인근에 숨어 지내던 소설가 박개주를 구출하기도 했다. 박정인의  행적은 박개주가 1955년 잡지 ‘아리랑’에 연재하면서 알려졌다.

그의 전설적 영웅담은 수용소탈출이 끝이 아니다. 천하제일 백골부대로 유명한 보병 3사단장 재직 시 북한군 도발원점을 초토화한 포격전 때문이다. 사건의 전후는 이렇다.

1973년 3월 7일 제18연대 전방대대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 작업 도중 북한군의 사격도발로 사상자가 생기자 그는 직접 마이크를 통해 사격중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경고를 무시하자 현장 지휘관 단독판단 하에 포병연대에 즉각적인 응징포격을 명령했다. 주력 포인 105㎜ 곡사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북한군 GP 내부를 관통해 폭발하는 바람에 북한군 GP 건물이 통째로 날아가고 36명이 몰살되었다. 북한군이 퇴각하고 전사상자가 수습되면서 사태는 종결되었다.  

이른 바 3·7 완전작전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의 미루나무 절단 작전인 ‘폴 버니언’ 작전과 더불어 휴전 이후 한국군이 북한의 도발의지 자체를 분쇄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불퇴전의 군인정신과 압도적 무력에 의한 응징보복의 결과다. 이로 인해 박정인은 5개월 후 예편된다. 그럼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기개를 높이 칭송하고 오랜 기간 격려했다고 한다. 

장군은 적 총탄을 평생 몸속에 갖고 살았다. 1953년 6월 8일 중동부전선 전투에서 그는 어깨, 가슴, 배 7개 처에 총탄을 맞아 혼절했다. 참모 부관들 모두 전사한 치열한 전투였다. 반격부대의 고지 탈환으로 극적으로 구조된 그는 미군 제47야전병원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장군은 불사신이었다. 

필자는 임종 전 병실에서 그에게 ‘백골’을 외치며 경례를 했다. 정신도 혼미하고 뼈만 앙상히 남았음에도 또렷이 ‘백골’ 복창 거수경례로 답하던 노장군의 희생과 헌신, 영웅적 기개가 눈에 선하다. 

장군 같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었고, 그 정신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나라가 건재할 수 있었다. ‘상하동욕’(上下同欲)의 기풍이 복원되어야 강군이 된다. 지난 5년 행정부대로 전락했다는 우리 군이 그를 본받아 야전성 회복에 나서길 기대한다. 

3대가 육군 장교 집안임을 자부심으로 삼던 노장군은 제주와도 인연이 깊다. 장자, 장손 며느리가 제주 출신이라서다. 제주 출신 필자도 백골부대 소대장 출신이라 감회가 남다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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