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체험
인문학의 체험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6.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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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식 시인

최근에 인문학의 기본 틀에 삶의 체험을 투영하는 습관이 생겼다.
 
엊그제 성격이 달라서 오해로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동안 주고받은 물건을 서로 돌려주려고 대화를 나누었다. 쌍방의 태도에서 인문학이 형성된다는 생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한때는 가장 친했던 사이였기에 그때 주고받은 물건이나 마음가짐도 친한 상태였다는 인식이 인문학을 체험하는 것이기에 돌려주되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푸념은 문학에 속하고, 이제 남이 되었으므로 받은 물건도 남이 되었으니 마땅히 돌려주어야 한다는 판단은 역사에 속하며,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이별이 허무하다는 인식은 철학에 속한다. 

돈과 관련된 경우도 돈을 빌려야 한다는 절박감은 문학에 속하고,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의무는 역사에 속한다. 채권자의 아량에 따라 받은 셈으로 치거나 그냥 다시 주면서 잘 살라는 너그러움은 철학에 속할 것이다.

남녀의 사귐에도 인문학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도전 정신은 문학이고, 결혼하면 평생을 함께한다는 결의는 역사이고, 인생은 피동과 결핍의 현장이므로 결혼하거나 안 하거나 후회하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이왕에 세상에 나왔으니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철학이다.

그래서 만날 때부터 생각하는 범주가 다르다. 차를 마시면서도 결혼할 상대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쏠려서 즐거움이 생겨서 즐기면 문학이고, 옷차림이 단아하고 예의가 반듯하여 성실한 사람이라서 호감이 간다는 판단은 역사이고, 이 만남 자체가 운명이므로 이 운명을 통하여 숙명이 펼쳐지고 있다는 인식 또한 철학이다. 그러니까 사람 마음은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인문학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가난, 극복, 생존이라고 압축할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원하지 않았으니 피동이고,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사실이 결핍이므로 그 자체가 가난이다. 여기서 가난은 고통과 같은 말인데 가난에서부터 문학은 출발한다. 가난을 벗어나려는 싸움이 곧 극복이므로 이 영역은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역사란 가난을 극복하고 경험을 축적하는 기록이다. 그렇게 고통을 견딘 결과로 생존을 획득하게 된다는 당위성이 곧 철학이다. 여기서 말하는 당위성은 인생의 즐거움과 보람이라는 인식의 획득이다. 그래서 문학은 저지르는 과정에서 뉘우침의 연속이고, 저지름에서 구한 깨우침으로 살아가는 방편이 역사가 되어 차츰 긍정적으로 이어져서 경험이 쌓이는 동안 선험적으로 삶의 가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므로 그 자체가 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란 어떤 존재인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나 자주 만나는 사람의 품성도 인문학에 대비시켜볼 필요가 있다. 인생을 즐기려는 성격이라서 자유분방하거나 인생에서 보람을 구하려고 엄격한 성격이라서 예의범절에 충실하거나 즐거움과 보람을 통하여 인생의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선지자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명예냐 실리냐, 혹은 두 가지 다 원하느냐에 따라 타이밍이 제각각이다.

며칠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에 그쳤다. 창밖을 살피려고 창문을 열었더니, 뒤에서 잔소리가 들린다. 모기 들어오는데 왜 창문을 여느냐고. 그냥 보면 안 되냐고.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어야 바깥 공기의 시원함을 맛보는데 모기 한 마리 때문에 문학을 잠시 접어야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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