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와 야생꽃사과나무
문학소녀와 야생꽃사과나무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6.0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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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 시인

나는 정원이 없다. 그래서 들판에 정원을 두기로 했다. 지금은 찔레덩굴나무와 청미래덩굴나무, 야생꽃사과나무 세 그루를 키운다. 법정은 ‘무소유’를 권했지만 나는 나무 세 그루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찔레와 청미래나무는 어린 날 따먹던 추억이 있어 인연 맺었고 꽃사과 나무 두 그루는 제 2의 인생기라 할 수 있는 최근에 만났다.

해마다 4월이면 제주에선 고사리 캐기가 한창이다. 고사리 밭이 없는 동네에 자라 산딸기 따먹으러 가는 게 전부였는데 어른이 되어 고사리 캐기의 묘미에 빠졌다. 올해도 변함없이 새벽 여섯 시만 되면 눈을 뜨고 고사리 밭으로 향했다. 나보다 더 빠른 고수들 차로 빽빽했다.

새벽이슬 맞고 쑥쑥 돋아난 고사리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하나 둘 정신없이 꺾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서 스무 개 넘는 고사리를 꺾기도 했다. 예전에 고사리 캐기 초보 때에는 허탕친 날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눈치와 요령이 생겼다. 
 고사리 캐는 일은 글 쓰는 작업과 같다. 처음엔 멍하니 방법을 모르다가 자꾸 경함할수록, 자꾸 실패를 거듭하고 퇴고를 수백 번 할수록 터득하게 되는 작법. 지금은 어느 정도 고사리가 있는 장소, 시기, 꺾는 법, 삶는 법, 말리는 법, 먹는 법을 다 터득한지라 느긋하다.

어느 날, 그날은 안개가 자욱했다. 그런 날은 고사리가 더 많이 출몰한다. 지체 없이 나는 떠났다. 새벽안개 자욱한 고사리 밭으로. 하나 둘 꺾는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꽃사과나무였다. 예전에 만났던 꽃사과나무 한 그루는 꽃이 활짝 피었었다.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번엔 달랐다. 근접한 다른 장소에서 만났는데, 진분홍 꽃봉오리로 가득했다. 나는 고사리 캐러 온 것도 잊어버리고 한참을 꽃사과나무와 마주 서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고사리에만 미쳐있을 뿐 꽃사과나무 따위엔 아무 흥미가 없었다. 나 혼자 문학소녀였다. 중학 시절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을 꿈꾸던 내가 드디어 시인이 되었음에도 아직 문학에 대한 사춘기 감정이 살아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았다. 꽃사과나무 앞에서 들뜰 수 있음에, 아직도 늙지 않은 문학소녀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얼른 가방 속에 놓아둔 핸드폰을 꺼내 몇 컷을 미친 듯이 찍었다. 괜히 아무도 몰래 비밀스레 만난 애인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는 꽃봉오리 몇 송이를 땄다. 차를 만들어 마시고 싶었다. 분홍꿈처럼 알알이 맺혀 있는 꽃송이들이 탐스러웠다. 꽃사과꽃차의 향을 음미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꽃봉오리를 씻어 차반에 널어놓고는 시집을 펼쳤다. 나희덕의 ‘야생사과’를 다시 한 번 음송하며 시심에 젖었다.

아마 이 시를 읽고 ‘꽃사과나무’를 ‘야생꽃사과나무’로 칭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만난 곳이 들판이었으므로. 정원에 심어진 눈요기의 대상보다 자유로운 영혼이므로.

한자로는 산사(山査), 영어로는 Crab apple이라 불리는 꽃사과나무는 장미과 사과나무속으로 원산지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이며 꽃말은 ‘이끄시는 대로’다. 자연이 이끄는 대로 詩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내 철학과 같다. 향긋한 향기가 나는 다섯 장의 꽃잎으로 흰색, 분홍색, 진홍색, 자주색 등을 띄는 꽃, 오묘하다. 때로는 봄날의 벚꽃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가슴앓이를 하는 시인처럼 사과꽃나무도 붉은무늬병, 검은별무늬병을 앓기도 하지만 잘 이겨낸다고 한다. 어쩌면 야생시인이라 불려도 좋을 듯하다.

우리 삶에 행복한 순간은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한 송이 꽃, 한 편의 詩에도 무한한 세계가 담겨 있으니. 우주를 모래알 수로 계산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모래알 한 알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도 노래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지금 나는 꽃사과차를 우려내어 마시고 있다. 상큼한 사과향이 배어나온다. 꽃과 교류하고 나무와 소통하며 블루 코르나 시대를 견뎌온 것 같다. 언제나 자연은 우리를 문학소녀로 만들어 준다. 다시 꽃사과꽃이 필 때쯤 들판정원으로 한 마리 나비처럼 날아갈 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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