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며
차를 마시며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5.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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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 시인

차를 좋아해 재미 삼아 심어놓은 녹차나무에서 올해 첫 찻잎을 땄다. 이른 봄 꽃샘의 찬바람과 눈발을 이겨낸 잎사귀가 연초록으로 환하다. 우전(雨煎)차는 24절기 중 하나인 곡우(穀雨) 전에 찻잎을 따서 만든 차를 말한다. 곡우(穀雨)는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으며, 음력 3월 중순쯤에서 양력 4월 20일 무렵에 해당한다. 이른 봄 가장 먼저 딴 찻잎으로 만든 차라 하여 첫물차라고도 한다.

아홉 번을 덖은 녹차는 연둣빛이 그대로 우러나와 부드러운 빛깔이 편안하다. 여린 찻잎으로 만들어 차 맛은 은은하고 순하다. 싱그러운 차향이 번진 한가한 봄날 오후의 공간은 한결 여유롭다. 시간은 깊은 연못의 짙은 빛으로 고요하다가 얕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시인의 시심을 흔들고 흘러간다. 생기가 느껴지는 기분 좋은 푸름 곳곳은 눈이 부신 햇살로 가득하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들꽃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고 소박하지만 제각각 잔잔한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전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어 더욱 사랑스럽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우리들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봄의 화사함과 봄꽃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우리의 쓸쓸함은 진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즐기고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만이 바로 나의 시간이고, 나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꽃이 저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피어나듯 우리도 스스로 자신을 보듬고 축복해줄 일이다.

겨우내 차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짙어진다/ 비바람을 견디며/ 여린 잎은 세상을 경계하는 얇은 막을 풀고/ 땅속에서부터 단단하게 밀어 올린/ 고통과 뜨거움이 숨어있는/ 가장 보드라운 연둣빛 잎을 피운다/ (.....) / 인내의 맛/ 아픔의 맛/ 헌신의 맛/ 견딤과 어울림의 맛/ 기다림의 고통을 덖으며 만들어낸/ 은은하고 맑은 완성의 향을 우려낸다/ - 금동원의 <차를 마시며> 중에서

2020년 1월이 떠오른다. 중국 우한에서 촉발된 코로나의 습격, 지루하게 이어져 온 코로나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전쟁, 두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내내 대치상태였다. 단 하루의 자유와 편안함도 허락되지 않았다. 휴전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더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밀리며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내일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로 이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순응하고 기다리며 성찰하고 겸손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라는 공포와 무지한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잘 견뎌왔다. 우리에게도 자축과 위로의 시간이 필요하다. 격려와 보답이 필요하다. 축제와 축배가 필요하다. 모두 애썼고 고맙고 잘 버텼다고, 잠시라도 차분하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상쾌하고 홀가분한 공기를 마셔보기로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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