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좋은 날
운수좋은 날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5.18 0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미경 수필가

차장 밖으로 마주하는 햇살이 따사롭다. 남편과 함께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누워 계시고 아버지는 마당에서 모처럼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계셨다. 자주 만나면서도 그리움과 반가움이 교차되어서일까, 어머니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시면서 온갖 것을 내어주시려 애쓴다. 부모님과의 안부를 여쭙고 마을 길을 산책하자고 해서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우리 동네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도시와 달리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는 물론 집안 속사정까지 손바닥 보듯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다. 지금도 가끔 시골에 오면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남편과 바닷가를 향해 걷기로 하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사이로 소박하면서도 운치 있는 시골 전경이 펼쳐진다. 얼마나 오랜 시간 먼 거리를 돌아 이곳으로 온 걸까, 골목으로 들어서자 한 집 건너 한 집이 폐허가 된 빈 집들이다. 이곳을 떠난 지도 수십 년이 지나고 있는데 마치 시간이 정지되었을 정도로 무엇 하나 변한 게 없다. 마당엔 철 따라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던 정갈한 곳이 덤불로 뒤덮인 모습을 보니 사람이 살았던 곳인가 싶을 만큼 삭막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어릴적 마음껏 뛰놀던 정겨운 동네, 그 아련한 기억들이 흑백 영화처럼 펼쳐진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는 말이 현실감 있게 다가선다. 세월 따라 나뭇잎이 떨어지듯 떠나버린 사람들, 보고 싶어도 아득한 기억 한편에 추억으로만 간직할 뿐, 마음 한켠이 아련하면서 시리게 다가온다. 

바닷가의 등대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차르르 차르르 물결 따라 조약돌 굴러가는 소리가 정겹다. 얼마 만에 마주하는 고향 바다인가, 허리 숙여 손을 물에 갔다 댔다. 손가락 사이를 보드랍게 감싸준다. 

햇살이 파도에 일렁이며 은빛 물결을 만들어 낸다. 일렁이는 파도를 따라 어디서 왔는지 갈색 해조류인 감태가 정처 없이 물에 둥둥 떠다닌다. 해양오염으로 떠내려온 불순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감태가 아닌 돌미역이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미역을 모으기 시작했다. 귀가 달린 긴 미역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싱싱한 갯내음이 입안에 번진다. 

 조개 잡고 고동 캐던 유년시절. 물때 맞추어 모여들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간이 지나도 마을은 그대로인데 그 시절의 인걸은 간 곳이 묘연하다. 

정들었던 마을 길을 거닐며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 내 유년시절의 꿈이 남아 있는 공간을 맞이한 날,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