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잘 읽히는 북한판 조선왕조실록
술술 잘 읽히는 북한판 조선왕조실록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5.12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조실록(1993)

북한판 ‘리조실록’, 국내서 영인 출판
400권 ‘거질’ 국어학자 홍기문 번역
한자어 한글로 풀어써 이해하기 쉬워
‘이조실록’ 제1권(위)과 제400권 표지.
‘이조실록’ 제1권(위)과 제400권 표지.

요즘 우리 책방에서는 리뉴얼 작업이 한창이다. 모두 네 곳으로 나누어진 책방의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우리 책방이 잘 할 수 있는 부분은 남기고 구색으로만 갖추고 있던 파트는 과감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렇게 지난 두어 달 동안 파지로 내친 놈들만 벌써 15톤이 넘는다. 연일 계속되는 중노동(?)으로 힘든 몸보다 곁을 떠나야 하는 책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더 아픈 상황이지만 눈물을 머금고 정리하고 있다. 모두 이대로 가다가는 곧 책방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서다.

그렇다고 그 책들이 가치가 없어서 내쳐진 건 아니다. 있으면 다 좋은 자료가 될 것인데 하면서도 내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애석하다. 그 중에서도 해고(?) 대상 영순위인 전집으로 된 아동서적을 솎아낼 땐 앞으로는 책방에 와도 고를 책이 없을 아이들 생각에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매장뿐만 아니라 창고에 보관된 책들 가운데서도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놈들은 일단 살생부(?)에 올려놓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 가운데는 아무리 공간을 차지해도 절대로 내칠 수 없는 책들도 있게 마련인데, 오늘은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이조실록’(여강, 1993) 제1권의 속 표지
‘이조실록’(여강, 1993) 제1권의 속 표지.

바로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해서 출판한 ‘리조실록’을 국내에서 영인 출판한 ‘이조실록’(여강, 1993)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창시절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이 책은 모두 400권이나 되는 거질(巨帙)로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국어학자 홍기문의 주도로 그가 원장으로 있던 사회과학원 산하의 민속고전연구소에서 번역했다.

제1권 이이화 선생의 해제 부분.
제1권 이이화 선생의 해제 부분.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어려운 한자 용어가 많이 포함된 연구자 중심의 번역이라서 비록 국역본이지만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남쪽의 번역본과 다르게 ‘사람들이 보고 알 수 있도록 쉬운 말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대부분의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 쓴 까닭에 술술 잘 읽힌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남쪽 국역본에서는 그냥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고 표기한 태조의 왕호(王號)조차도 ‘극히 어질고 왕조를 창시하였으며 뛰여나게 문명하고 비상히 용감한 태조강헌대왕’이라고 풀어 놓았고, ‘해사(該司)’는 ‘해당 관청’, ‘점경미(粘粳米)’는 ‘찹쌀’로 표현하는 등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했다. 

제1권의 태조실록 첫 부분.
제1권의 태조실록 첫 부분.

물론 인명을 한글로만 표기할 경우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더욱 힘들어지거나 너무 풀어 놓은 까닭에 외려 내용이 명확하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부분이 있는 등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번역본이 아니라 한자 단어 사이사이에 한글 토씨만 달아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현학적(衒學的)’인 아니 어떤 분 말씀대로 그냥 ‘날로 먹은’ 일부(?)의 남쪽 번역보다는 장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남쪽의 번역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국역문과 원문텍스트에 원문이미지까지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구하기 힘든 책으로만 봐야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아쉽다. 북쪽의 번역도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좋은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제400권의 일러두기.
제400권의 일러두기.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