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판 ‘리조실록’, 국내서 영인 출판
400권 ‘거질’ 국어학자 홍기문 번역
한자어 한글로 풀어써 이해하기 쉬워
요즘 우리 책방에서는 리뉴얼 작업이 한창이다. 모두 네 곳으로 나누어진 책방의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우리 책방이 잘 할 수 있는 부분은 남기고 구색으로만 갖추고 있던 파트는 과감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렇게 지난 두어 달 동안 파지로 내친 놈들만 벌써 15톤이 넘는다. 연일 계속되는 중노동(?)으로 힘든 몸보다 곁을 떠나야 하는 책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더 아픈 상황이지만 눈물을 머금고 정리하고 있다. 모두 이대로 가다가는 곧 책방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서다.
그렇다고 그 책들이 가치가 없어서 내쳐진 건 아니다. 있으면 다 좋은 자료가 될 것인데 하면서도 내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애석하다. 그 중에서도 해고(?) 대상 영순위인 전집으로 된 아동서적을 솎아낼 땐 앞으로는 책방에 와도 고를 책이 없을 아이들 생각에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매장뿐만 아니라 창고에 보관된 책들 가운데서도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놈들은 일단 살생부(?)에 올려놓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 가운데는 아무리 공간을 차지해도 절대로 내칠 수 없는 책들도 있게 마련인데, 오늘은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바로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해서 출판한 ‘리조실록’을 국내에서 영인 출판한 ‘이조실록’(여강, 1993)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창시절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이 책은 모두 400권이나 되는 거질(巨帙)로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국어학자 홍기문의 주도로 그가 원장으로 있던 사회과학원 산하의 민속고전연구소에서 번역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어려운 한자 용어가 많이 포함된 연구자 중심의 번역이라서 비록 국역본이지만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남쪽의 번역본과 다르게 ‘사람들이 보고 알 수 있도록 쉬운 말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대부분의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 쓴 까닭에 술술 잘 읽힌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남쪽 국역본에서는 그냥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고 표기한 태조의 왕호(王號)조차도 ‘극히 어질고 왕조를 창시하였으며 뛰여나게 문명하고 비상히 용감한 태조강헌대왕’이라고 풀어 놓았고, ‘해사(該司)’는 ‘해당 관청’, ‘점경미(粘粳米)’는 ‘찹쌀’로 표현하는 등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했다.
물론 인명을 한글로만 표기할 경우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더욱 힘들어지거나 너무 풀어 놓은 까닭에 외려 내용이 명확하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부분이 있는 등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번역본이 아니라 한자 단어 사이사이에 한글 토씨만 달아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현학적(衒學的)’인 아니 어떤 분 말씀대로 그냥 ‘날로 먹은’ 일부(?)의 남쪽 번역보다는 장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남쪽의 번역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국역문과 원문텍스트에 원문이미지까지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구하기 힘든 책으로만 봐야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아쉽다. 북쪽의 번역도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좋은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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