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5.09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근 칼럼니스트

올 듯 말 듯 지독히도 애를 먹이던 계절이 봄인가 싶더니 다시 춥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유채가 피고 벚꽃이 피고 지고 신록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어!’ 하는 사이 시간은 가고 낮이 길어진다. 고사리 장마라 불리어야 할 날씨도 지나고 도로변에 정체불명의 차들이 갓길 주차를 일삼고 있다. 길 없는 들판을 헤매는 사람들이 늘었다. 고사리 채취객이다.

언제 추웠냐 싶게 땀을 흘리게 하는 날씨다. 일상이 도망치듯 내 기억에서 멀어진다.   

얼마 전 유채와 벚꽃이 함께 펴 전국적으로 유명한 녹산로 길을 지날 때였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채우고 온갖 포즈를 취하며 표정들이 밝다. 

‘여기는 초입에 불과해요. 한참을 더 가야 제대로 된 풍광이 나올 겁니다.’

일찌감치 초입에 차를 세우고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데 초입의 모습만으로도 감동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굳이 차를 세워가며 산통을 깰 일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시간을 음미하기를 기대하며 내 갈 길을 간다.

빨리 지나기 아쉬운 앞차들이 속도를 늦추면 어쩔 수 없이 관광객들을 따라 속도를 늦추며 괜히 이 길을 들어섰다는 후회를 했다.

매년 둘러보는 꽃길에서 이제 더 이상 차를 세워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거나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며 인생 샷을 기대하는 일이 없어졌다. 감각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괜한 억지를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바라다보이는 바다에 어느새 감동보다 무던함이 생활이 되는 것과 동일한 상황일 게다.

길을 빠져나와 본래의 목적지를 향했다. 긴 시간의 정체를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이 지나고 서울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제주시 동쪽에서 서쪽까지 함께 협업할 공간을 둘러보기 위한 만남이다. 지역의 특성을 알려주고 마을마다 다른 분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자리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식당에서 점심 약속을 하고 만나러 나섰다. 자리에 나타난 사람들이 한껏 기분이 고무되어 있다. 밭담과 그 안에서 한창 자라고 있는 양배추밭의 정경이 너무나 좋아 잠깐이지만 힐링하고 왔다는 이야기다.

제주시가 온통 밭담에 둘러싸인 밭작물이 자라고 시간에 따라 파종하고 수확하기를 거듭한다. 당근에 이어 메밀이 곧 들판에 꽃을 피우며 수많은 관광객을 유인할 텐데. 그 사람들은 꽃도 아니 밭에 작물이 자라는 마을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한껏 고무되다니 사실 조금은 의외고 뜻밖이다.

언제부터일까. 꽃길을 무덤덤하게 지나치고 들판의 푸르름은 관심에서 사라지고 바다는 언제나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간이.

제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를 생각해본다. 매주 주말이 새로운 탐색과 경이의 연속이었던 시절이었다. 제주의 자연과 바다가 그토록 나를 이끌었던 시절이 어느 때부터 당연한 것이 되었던 것일까. 겨우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매너리즘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나의 일상의 풍경과 사실에 놀라고 만족해하며 경외감을 보이며 찾아든다.      

소중한 무언가를 그냥 놔두고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잔소리를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느덧 서울을 가면 하루를 보내기 전 제주로 내려오고픈 심정이 올라오는 자신을 보고 놀랐던 게 언제였지.

눈이 따갑고 마음이 불편했던 경험에 의아해하며 제주행 비행기를 서둘러 타야 했던 시간이 됐는데 왜 정작 양배추밭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않으며 꽃길을 찾아가는 설렘을 가슴에 묻는 것일까.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귤밭에 둘러싸인 사무실 환경부터 고즈넉한 순간들을 보고 감동을 받지 못하는 나를 탓한다. 참 어이없는 무감각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