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이라는 이름의 환상
공정이라는 이름의 환상
  • 뉴제주일보
  • 승인 2022.04.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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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건 문학박사

공정이라는 말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지는 오래다. 하지만, 늘 문제 제기는 하면서도, 해답은 요원한 정치적 용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민족 특유의 ‘정(情)’ 문화가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정(情)’은 한국인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맺는 유대(끈·줄)이다. 구체적으로, 좁게는 핏줄이며 인연(연줄)과 등가(等伽)이고, 크게는 인간관계와도 등가이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삶의 희비가 엇갈리고 사회적 성공 여부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내편-네편이라는 집단의식으로 확장되게 되며,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더 나아가 각종 부조리의 원천이 되곤 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러한 관념을 집단무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가족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효용성이 높지만, 개인이 중심이 되는 현대후기산업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공정’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그동안 당연시되었던 ‘정’의 개념을 초월하기 위한 시도가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공정성의 문제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피해를 볼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그것이 아무리 부조리하더라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온정주의’가 판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스포츠는 그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한 사회의 여러 측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80년대 초창기 프로야구에는 지역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지역간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다. 그 와중에 선수단 버스가 불에 타는 관객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것은 그 당시 정점을 향해가는 우리 사회 지역감정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었다. 그 이후에도 승부조작 뉴스, 선수 음주 운전 파동, 선후배 폭행 사건 등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문제점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반영해주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역할을 하곤 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공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런데, 다시 스포츠계의 공정이 도마에 올랐다. 그동안 스포츠계는 ‘클린 스포츠’를 내세우면서 무엇보다 공정하고 깨끗한 스포츠를 통해 국민들의 ‘공정에 대한 사회적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청량제 역할을 해 왔다. 건강하고 행복한 스포츠 문화를 조성함으로써 국민의 여가 생활을 유익하게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옛날 모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드러난 셈이다. 언론에 의하면, 그것도 연맹의 고위 임원이 개입된 사건이며, 4년 동안이나 그러한 일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러한 어른들을 향해, 타석에 들어서는 학생 선수들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곤 했을 것이다. 야구 그라운드는 신성한 것이니, 심판에게 절대 복종하라는 정신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게 학생 선수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일까? 인생을 걸고 노력해 온, 선수와 가족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노력을 배신당한 것이다. 그 한을 어디에 풀어야 할까? 그런 줄도 모르고 학생 선수들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프로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그 아픔을 이겨내라는 강요를 받아왔던 것이란 말인가. 자신의 실력을 공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빼앗긴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무려 4년 동안, 그들의 꿈을 지지해 주고, 지원해 주리라고 믿었던 어른들의 배신. 그들의 빼앗긴 시간과 비용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오로지 프로 진출 하나만 바라보고 밤낮 몸을 혹사시키면서 노력해 온 선수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우리 사회를 이렇게밖에 만들어내지 못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청년들에게 미안하다. 공정한 경쟁을 치르며 미래를 꿈꿔온 학생들을 배신하도록 설계된 대입제도나, 각종 제도의 빈틈을 파고 든 일부 기득권층의 삐뚤어진 특권의식과 특혜가 허용되는 나라. 그 모습은 스포츠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 젊은이들은 무엇인들 믿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꼼수와 부조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는 의식이 청년들에게 각인되어버리면, 우리 사회에 미래가 있겠는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퍼져 있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은 이러한 절망성에 대한 상징적 반응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공정해야 할 스포츠에서마저 금수저가 판을 치고, 공정이 무너진다면, 선수들은 무엇을 믿고 살란 말인가? 스포츠는 규칙의 절대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한 번 만들어진 규칙은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지켜져야 하며, 예외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예외가 인정되고, 피해자가 구제받지 못하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해자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단면과 너무나 닮아 있다. 어른들이여, 어른답게 살자. 어린 아이들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우리 스포츠가 죽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우리 청년들의 꿈이 죽어가고 있다. 몇몇, 몰상식하고 자격없이, 서로 똘똘 뭉쳐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람들 때문에. 최근 프로야구 관중의 급격한 감소로 프로스포츠계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국민이 왜 프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게 되고 있는지, 깊이 있는 성찰과 대책이 필요하다. 입으로만 하는 공정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우리의 사회를 파괴할 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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