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유난히 많은 4월이다. 할아버지는 70여 년 만에 한을 풀었다며 4·3 재심 법정에서 울었다. 다른 할아버지는 4·3 행방불명인 묘석에 눈물섞인 막걸리로 제를 올렸다.
4·3의 눈물은 또 있다. 다랑쉬굴의 눈물이다.
지난달 찾은 4·3유적지 다랑쉬굴은 봄 날씨에도 차갑게 바람이 불었다. 인적은 드물었고 도로에 이정표도 제대로 없던 터라 찾기조차 어려웠다.
다랑쉬굴은 유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만 빼면 텅 빈 공터였다. 이곳이 4·3 진상 규명의 기폭제 역할을 한 유적지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랑쉬굴 일대는 사유지다. 토지 매입도 안돼 공적 조처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랑쉬굴은 하도리·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토벌대에 발각, 굴 입구에 놓인 불 연기 때문에 질식사한 장소다.
44년 후인 1992년 4월 4·3연구소 등 합동조사반의 유해 발굴로 빛을 봤다.
굴속에서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이 포함된 11명의 유해와 솥, 항아리, 질그릇, 물허벅 등 생활용품이 발견됐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45일 만에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렸고, 이 사실이 보도로 알려지면서 침체됐던 4·3 진상 규명의 물결이 거세졌다.
하지만 정작 다랑쉬굴 학살의 진상과 잔존 유해, 유물 발굴 등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1948년 12월의 진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30년째 묻혀있다.
4·3 74주년과 다랑쉬굴 발굴 30년을 맞아 최근들어 다랑쉬굴 관련 이야기가 많이 쏟아졌다.
핵심은 다랑쉬굴의 진실을 밝히고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어릴 때 오빠와 생이별한 함덕순 할머니(80)와 같은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들의 눈물은 계속될 것이다.
정용기 기자 brave@jejuilbo.net